“‘김일성의 아이들’아, 이승만의 ‘건국 전쟁’ 보러 가자!”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19회>
‘김일성의 아이들”을 위한 영화 “건국 전쟁”
1980년대 대학에 들어가 마르크스 추종자가 되고 “김일성의 아이들”로 거듭났던 86세대 운동권들은 날마다 머릿속으로 이승만을 형틀에 묶어두고 “미제 꼭두각시 남북분단 원흉”이라며 돌팔매질 해댔다. 해방 전후사에 관한 극좌 편향 역사관에 빠져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했던 주사파 집단은 더더욱 이승만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풍문과 헛소문만 듣고서 이승만을 증오하고 조롱했으며, 거짓 선전과 허위 선동을 일삼으며 그의 인격을 살해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김일성을 향한 숭배심이 자라날수록 이승만에 대한 적개심은 커져만 갔다.
문제는 86세대가 이승만에 관해선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을 향해 “분단 원흉,” “친일 매국노,” “미제의 꼭두각시,” “독재자” 등 막말을 일삼는 이들은 정작 이승만이 누군지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 모르면서 분노하고, 모르니까 증오한다. “먹물”의 자기기만, 레닌이 말하는 좌익 소아병이다. 역사적 무지가 정치적 극단주의를 낳는다.
동유럽 여러 나라를 누비며 1950년대 북한전쟁 고아들의 진귀한 영상을 발굴하여 다큐멘터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2020년)을 만든 김덕영 감독이 최근 “건국 전쟁”으로 돌아왔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이승만을 둘러싼 악의적 모함, 무도한 거짓말, 음해성 가짜뉴스, 교묘한 이미지 조작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해체하는 정직하고 성실한 작품이다.
희귀 영상과 함께 논쟁적 이슈가 치밀하게 연결되어 흥미진진하면서도 스릴감이 넘친다. 누구보다도 1980~90년대 북한의 선전·선동에 넘어가서 청춘을 허비했던 “김일성의 아이들”이 꼭 봐야 할 중요한 기록영화다. 바로 그들의 귓가에 속삭이고 싶다. “김일성의 아이들아, 함께 손잡고 ‘건국 전쟁’ 보러 가자!”
대한민국을 만든 이승만의 의지와 비전
40년의 세월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스탈린 공산 전체주의의 직접적 위협을 물리치고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신생 독립 국가를 극적으로 건립한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위인이다. 류석춘 교수가 지적하듯 대한민국의 건국은 60여 년 긴 세월에 걸쳐서 이승만의 근대화 의지, 항일 의지, 그리고 반공 의지가 역사적으로 실현되어 간 파란만장의 과정이었다.
1) 이승만의 근대화 의지란 서구의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 왕조사의 구습과 병폐를 철폐하고 한반도에 자유롭고, 민주적이고, 개방되고, 헌정적인 근대적 국민국가를 세워야만 한다는 간절한 염원과 선명한 비전과 부동의 확신을 이른다.
2) 이승만의 항일 의지는 미·영 중심의 새로운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도래를 내다보고서 한국의 운명을 그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구체적인 외교 전략이자 구체적인 독립 노선으로 표출되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가 시대착오적 군국주의에 빠져 이미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확신하고, 미국이 일제를 무너뜨릴 때 한국에 독립이 올 수 있음을 내다봤다. 자유민주주의자 이승만의 항일 의지는 단순한 종족주의적 반일 감정이 아니었다. 그는 전 세계를 향해서 일본 제국의 정신병적 천황 숭배, 쇼비니즘적 팽창주의, 전체주의적 인간성 파괴와 민족 말살의 식민주의를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신랄하게 고발했다.
3) 이승만의 반공 의지란 스탈린의 지령을 받는 북로당과 남로당의 연합 작전에 대항하여 천신만고의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았던 그의 확고부동한 자유의 정치 철학과 예언자적 혜안을 이른다. 1940~50년대의 국제 정세 속에서 이승만은 자유 진영의 그 어떤 지도자보다 공산주의의 이념적 악마성을 더 명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이승만의 반공 의지는 미국 시민사회의 여론을 움직여 공산정권과 타협하려는 미국 의회의 정치인들을 압박하고, 미국 정부를 설득하여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의 최전방으로 존속시키는 그의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표출되었다.
예지자 이승만의 독립운동: 국제 정세를 바꾸는 외교 노선
이승만은 진주만 공습 이전에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에서 임박한 일제의 미국 침략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그는 무섭도록 날카로운 형안(炯眼)의 예지자였다. 진주만 공습이 터진 후 패닉 상태에 빠진 미국인들은 이승만의 설명을 듣고서야 왜 미국이 일제의 급습에 속수무책 당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승만은 1882년 조미 통상조약을 어기고 일제의 조선 합방을 방치한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의 원칙 배반과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고도 “대한 독립”을 외면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대통령의 자기모순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미국이 외교적 고립주의의 미망에 빠져서 전체주의 파쇼 정권의 등장을 수수방관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승만은 미국 정부를 향해서 미합중국을 건립한 국부들의 의도에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임무를 완수하라 촉구했다. 미국 헌법의 기본 정신을 일깨워 미국 정부를 움직이는 이승만의 “도덕 외교(moral diplomacy)”는 세계 대전의 격변기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지금도 이승만이 미국의 꼭두각시였다는 근거 없는 악성 루머가 한국의 다수 대중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지난 60여 년에 걸쳐서 이승만에 악감정을 품은 학계와 언론계와 문화예술계의 좌편향 인사들이 줄기차게 역사를 왜곡하고 허위 정보를 생산하고, 가짜뉴스를 유포하고, 영상매체를 악용해 거짓 선동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교육활동과 외교 독립운동을 재조명한 책 저서 <<외국 친구들(Foreign Friends)>>의 저자 미국 위스콘신 대학 대빗 필드(David P. Fields) 교수는 일언지하로 그러한 악성 루머가 모두 거짓이라 단언한다.
미국 여론을 움직여 미국 정부를 견인하는 외교술
이승만은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지도, 미국의 권력자에 아첨하지도 않았다. 그는 1945년 이전부터 이미 미국 시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미국 정치를 움직이는 놀라운 외교력을 발휘했다. 특히 일제의 진주만 습격 이후 이승만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Pearl S. Buck, 1892-1973), 대통령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 1884-1962) 등의 후원을 받으며 중요한 집회 현장에서 미국의 세계사적 임무와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사명이 무엇인지 새삼 일깨웠던 미국인의 스승이었다. 1910년대부터 이승만은 미국 전역을 다니며 수백 회의 대중 연설을 통해서 자유민주주의 기본 정신과 미국의 임무를 설파했다. 물론 그의 목적은 “대한 독립”의 역사적 당위성과 도덕적 정당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코리아란 국명도 잘 모르던 평범한 미국인의 의식에 이승만은 한국이 일본과 투쟁하는 미국의 친구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1945년 4월~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창설을 위한 국제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해 2월 얄타 회담 당시 소련의 스탈린과 비밀 조약을 맺었다고 맹비난하면서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요청했다. 같은 해 10월 16일 33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승만은 도착하기 무섭게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안이 소련의 한반도 지배를 감추는 속임수라 비판하면서 즉각적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미군정 하지(John R. Hodge, 1893-1963) 중장은 격노했지만,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대다수 국민은 그를 지지했다. 이승만은 미군 점령기 소련과의 모든 타협 시도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저지했다. 1948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미국의 지원이 있든 없든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이승만은 한반도가 재통일될 때까지 전쟁을 중단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는 휴전협정에 한국군 대표를 보내지 않았고, 심지어는 휴전 지역에 한국군 공군을 보내서 폭격하기도 했다. 휴전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3년 6월 18~19일 이틀에 걸쳐 이승만은 “제네바협약과 인권 정신”을 근거로 전국 8개 포로수용소에서 2만7388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중대 결정을 감행했다.
놀랍게도 그 결과 유엔군 사상자가 더욱 늘어났음에도 미국인의 다수는 이승만을 지지했다. 1953년 6월 갤럽 조사에 따르면 “한국이 우리와 협조한다고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57%의 국민이 긍정 답변했다. 부정 답변은 22%에 그쳤다. 명실공히 세계 최강국 미국의 다수 시민은 왜 태평양 건너 약소국의 대통령 이승만을 그토록 지지하고 응원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연세대학교 이승만 연구소에 소장된 2,700여 점의 “지지 서한(letters of support)”들 속에 숨어 있다. 이 서한들은 대부분 미국 각계각층의 다양한 시민들이 자유 투사 이승만에게 자발적으로 발송한 감사의 글이다. 미국의 계관 시인(poet laureate)들도 그를 칭송하는 시를 써서 헌정했다.
“그대가 든 횃불로 별과 사람이 움직이니
그대 정신은 드높이 타오르는 코리아이려니~”
“Yours is the torch that men and stars move by,
Your Spirit is Korea flaming high.”
미국의 시민들은 그렇게 미국의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을 꾸짖고 일깨우는 완강한 자유민주주의자 이승만의 슬기와 용기에 경탄하고, 강단과 기지에 열광했다. 이승만에 대한 미국 시민의 광범위한 지지와 존경이 있었기에 이승만은 공산 세력과 타협하려는 미국의 정치인들을 당당하게 꾸짖을 수 있었고,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과단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의 탁월한 외교력은 국제정치에 대한 그의 해박한 식견,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 인류적 보편가치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그의 과감한 결단력에서 나왔다. 이승만은 범인류적 보편가치를 선양하고 자유주의의 기본원칙을 설파하고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확신했기에 언제 어디서든 그의 발언은 일관되고, 정연하고 당당했으며, 돌직구처럼 날카롭고 간명했다.
1954년 7월 28일 이승만은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 초빙되어 연설했다. 그는 미국의 공군과 해군이 중국과 북한의 공산 세력과 전면전을 준비하는 한국의 150만 병력과 대만의 63만 병력을 지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자유 진영이 중국 본대륙을 되찾지 못하면 공산 세력의 궁극적 승리를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은 250만 상비병력을 갖추고 있지만 한국전 당시 중국 측 포로 14,369명이 대만으로 간 반면, 오직 220명 만이 대륙을 택했음을 기억하자고 그는 미국 의회에 촉구했다. 연설 막바지에 그는 “이 세상을 힘겹고 두렵게 만든 공산 세력에 대해 부드럽게 대하면 곧 노예 신세를 면할 수 없다”면서 미국 독립전쟁의 이상과 남북전쟁의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 모두 궐기하자고 부르짖었다. (New York Times, 1954. 7. 29) 이승만의 연설에 대한 미국 의회는 33차례나 열광적인 기립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닷새 후인 8월 2일 이승만은 뉴욕 맨해튼 중심가를 관통하는 마천루 사이 “영웅의 협곡(Canyon of Heroes)”에서 수십만 뉴욕 시민의 환대를 받으며 가두 행진을 할 수 있었다. 강건한 자유민주주의자 이승만은 그렇게 미국의 건국 이념을 미국 의회에서 일깨웠고, 이에 감동한 미국의 시민들은 자유·민주·독립의 혁명가 이승만에게 지상 최고의 가두 행진을 누리는 기쁨을 베풀었다. 그 순간 자유 투사(freedom fighter) 이승만은 진정 세계사적 인물로 기록되고 있었다.
2023년 4월 중순 김덕영 감독은 캐나다에 살고 있는 생면부지의 나에게 이승만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며 이메일을 보내왔다. 며칠 후 첫 전화 통화에서 그는 나에게 도서관과 기록원을 몇 달 동안 샅샅이 뒤졌건만 1954년 8월 2일 뉴욕시 맨해튼 이승만 대통령 가두 행진의 동영상을 찾을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김 감독은 1950년대 대한 뉴스를 면밀하게 검토하다가 누군가 바로 그 가두 행진의 첫 프레임만 남겨놓은 채 나머지는 싹둑 잘라 제거했음을 발견했다. 누군가 고의로 그 필름을 가위질했지만, 지구 어딘가엔 그 영상이 존재함을 확신한 김덕영 감독은 땅속의 유물을 캐는 고고학자처럼 사라진 영상을 찾아다녔다.
결국 지난해 6월 그는 미국 워싱턴 DC 부근의 국립 문서기록 보관소(NARA)에서 긴 세월 미국 정부에서 요원으로 근무했던 한 미국인의 도움을 받아 45초짜리 문제의 동영상을 찾아냈다. 70년의 세월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그 영상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빛나는 한 장면이다. 이제 그 영상이 영화 “건국 전쟁”의 은막 위에서 국민 눈앞에 공개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세운 이승만, 공산 디스토피아를 만든 김일성
1948년 건국된 이래 대한민국이 단계적으로 성취해 간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의 전 과정은 이승만의 근대화 의지, 항일 의지, 반공 의지가 없이는 설명될 수가 없다. 구체적으로 이승만은 남로당의 반란과 폭동, 북로당의 공산 침략 전쟁에 맞서서 미국 주도의 자유적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 속에 대한민국을 편입시킨 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개방적 무역 입국의 기초를 닦았다. 이승만의 3대 의지를 빼고서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북한에선 불멸의 절대군주로 추앙되며 전 인민의 인격신으로 군림하는 김일성이란 인물의 강력한 공산화 의지, 불굴의 반미 의식, 완고한 쇄국 열정, 마오쩌둥식 대민지배욕, 스탈린식 불멸 의지를 빼고선 오늘날 북한 현실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 히틀러를 빼고서 독일 제3제국의 정치범죄를 논할 수 없고, 스탈린을 빼고선 구소련의 인권유린을 논할 수 없음과 같은 이치다.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이승만이 추구한 자유민주주의가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고, 김일성이 추구한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이 오늘날의 북한을 만들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승만 노선은 자유와 민주와 독립과 번영의 큰길을 열었다. 김일성 노선은 억압과 독재와 예속과 빈곤의 수렁을 팠다.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는 인류적 보편가치며 한국사의 정통 이념이다.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전체주의적 궤변이며 민족사의 반역 사상이다.
바로 그 점에서 86세대 주사파 운동권들은 한국 헌정사 최악의 이념적 일탈자들이었다. 그들은 1960년대 대한민국에 태어나 학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배우며 자랐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헌법이 보장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역으로 악용해서 그들은 김일성을 떠받들었다. 단파 라디오로 북한 방송을 들으며 조선노동당과 통일전선을 이뤄서 대한민국의 체제 전복을 꾀했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김일성의 아이들”이 손쉽게 정치권력을 거머쥐고 승승장구하는 부조리와 불합리를 속수무책 방치해 왔다. 인간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고 믿고 다시금 그들의 귓가에 속삭여 본다. “‘김일성의 아이들’아, 함께 손잡고 ‘건국 전쟁’ 보러 가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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