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꽃 피네, 동백에 매화 피네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폭설이 지나간 후에 방문한 제주에는 곳곳에 눈이 쌓여 있었다. 그래도 남쪽 섬이라 겨울에도 초록색 지피식물들이 땅을 덮고 있었다. 그 위에 눈이 내려앉으니, 마치 흰 생크림을 얹은 녹차 셰이크 형상이었다.
원래는 동백을 보러 떠난 여행이었다. 그런데 따뜻한 겨울 날씨 때문에 평년보다 46일이나 일찍 만개한 매화를 보았다. 일찍이 조선의 원예 백과사전인 화암수록은 ‘스물여덟 가지 벗의 총목록’에서 봄에 피는 매화인 춘매는 예스러운 벗, 동백은 신선 같은 벗이라고 했다. 지금 제주에는 이들 벗만 있는 게 아니다. 유채꽃, 제주수선화, 제주백서향도 만발했다.
●백설(白雪)과 붉은 동백
제주는 지난해 12월부터 동백꽃 대궐이었다. 우리나라 토종 동백은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눈물처럼 후두둑 (통째로) 지는 꽃’이지만 요즘 제주의 동백 성지들에서는 애기동백의 꽃잎이 한 장 한 장 나비처럼 흩날려 진분홍 카펫을 펼쳐낸다.
제주의 동백 명소들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날그날의 동백 상황을 중계한다. 여행을 준비할 때 참고하라는 뜻에서다. 그만큼 제주 겨울 여행의 백미가 동백이다. 전통의 ‘카멜리아힐’과 ‘동백수목원’을 비롯해 최근 생긴 ‘가시림’과 ‘동백포레스트’ 등이 동백 명소로 꼽힌다.
이번 여행에서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두 달 전 문을 연 ‘가시림’에 가봤다. ‘생각하는 정원’, ‘베케’ 등을 잇는 제주의 새로운 민간 정원이다. 시간을 더한 마을이라는 뜻의 가시리(加時里)는 말을 키우던 목장이 넓게 자리하던 곳이다. 조경 사업을 하던 강남춘 대표(57)가 1만4000m²의 땅을 사들여 ‘시간을 더한 숲’이라는 뜻의 가시림을 가꿨다.
제주는 봄같이 따뜻한 겨울 날씨였다. 그러다가 폭설을 맞았으니 동백꽃이 얼고 상했다. 제주 자생나무인 구실잣밤나무가 기후위기로 고사하는 일이 생겨나는 가운데 이젠 동백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동백나무는 동박새가 꽃가루를 운반해 주는 조매화(鳥媒花)다. 날씨가 따뜻해져 동박새가 점점 북상하고 있다니 걱정이다.
설탕처럼 반짝이는 눈 위에 떨어진 동백은 애련해서 아름다웠다. 동백의 꽃말은 진실한 사랑, 겸손한 마음이다. 꽃 한 송이 전체가 뚝뚝 떨어지는 토종 동백의 기개와 살랑살랑 꽃잎을 날리는 애기동백의 퇴장은 느낌이 크게 다르다. 사랑의 형태가 다를 뿐, 속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가시림에는 300여 그루의 동백나무만 있는 게 아니었다. 60여 그루의 황금 메타세쿼이아 터널, 카페 앞 삼지닥나무와 금감자…. 이끼볼 등 반려식물을 판매하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제주의 자생식물을 소개하면서 정원의 향유층을 젊은 세대로 넓히는 모습이었다.
정원 안쪽에 병풍처럼 둘러싼 동백나무들 뒤로는 제주 자생나무인 멀구슬나무, 종가시나무, 후박나무가 이끼들과 어우러져 있었다. 곶자왈을 걷고 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흰배롱나무 밑에 산수국과 목수국이 섞어 심어진 모습을 보니 다가올 계절들의 꽃 피는 정원이 마음속에 그려졌다.
3년 전 문을 연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 그랜드조선제주의 오름 정원(6600m²)도 잘 알려지지 않은 동백 명소다. 햇볕이 잘 들어 중산간보다 동백이 여전히 싱싱한 모습이었다. 제주의 오름을 형상화한 오름 정원에는 물 없이 돌을 배치한 일본식 고산수 정원도 있다. 여름철에는 ‘수국 맛집’이라고 한다.
●봄꽃들의 인사
제주로 향하기 직전에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 소장이 매화 개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놓은 걸 보고 연락해 봤다. “벌써 매화가 피었습니까.” “서귀포 걸매생태공원에 가면 쉽게 볼 수 있을 겁니다.”
제주에 자주 가 봤지만, 걸매생태공원은 초행이었다. 중문에서 천지연 폭포 근처의 이 공원으로 향하는 1132번 도로 양옆은 온통 빨간색이었다. 제주의 겨울에는 동백만 있는 게 아니었다. 먼나무의 빨간 열매가 도로를 환히 밝힌다. 멀리에서 보면 열매가 아니라 빨간 꽃 같다. 그래서 먼나무의 이름 유래 중에는 ‘(나무와 열매가) 멋(스러운) 나무’라는 설도 있고 ‘멀리에서 보아야 제격인 나무’라는 뜻도 있나 보다.
걸매생태공원은 관광객보다는 도민들의 일상 공간인 듯했다. 아침 조깅족들이 “저기에 매화가 있어요”라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매화꽃 향기를 전하는 장소 중 한 곳이었다. 대개는 2월 초순 꽃망울을 터뜨리는데 역시나 올해는 빨랐다. 연분홍색 ‘꽃 팝콘’이 풍성했다. 아치형 다리 밑 물가에는 오리들이 헤엄치고, 노란색 유채꽃도 피었다.
매화까지 봤으니 오설록 티하우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시간이 없는데 딱 한 곳, 제주를 느끼러 간다면 어디로 갈까”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추천하고 싶은 장소 중 한 곳이 서귀포시 안덕면의 오설록이다. 전면에 유리 통창을 배치해 제주의 돌과 식물을 감상하며 한라봉과 녹차 음료를 마실 수 있게 한 공감각적 공간이다.
오설록에는 봄을 알리는 구근식물인 제주수선화가 만발했다. 그 옆 제주백서향의 은은한 향기는 너무도 황홀해 온종일 코를 대고 있고 싶을 정도다. 땅을 덮은 보라색 해국도, 겨울에도 싱그러운 초록 기운을 전하는 서광차밭도 반가웠다. 봄은 그렇게 고양이처럼 오고 있다.
●스토리를 담아가는 제주
제주에는 꽃이 주인공이 아닌 정원도 지난해 말 문을 열었다. 서귀포시 남원읍의 ‘담소요’다. 오롯한 쉼을 내세운 이곳에서는 현재 ‘헬로, 윈터’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정원 분야 명저 중 하나인 카렐 차페크 작가의 ‘정원가의 열두 달’ 책을 주제로 한 작은 전시다. 꽃보다는 풀을 많이 심어 사색의 정원을 표방한 이 정원에는 ‘모짜’ ‘렐라’ ‘체다’라는 이름의 오리 세 마리도 산다.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안돌오름 비밀의 숲은 가뜩이나 아기자기 예뻤는데 요즘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에 나오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내비게이션 안내대로 가다 보면 비포장도로를 만나는데 그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다. 흰 눈이 남아 있는 비포장도로 주변 풍경은 제주의 야생을 고스란히 전한다.
이곳의 트레이드마크는 매표소를 겸한 민트색 푸드트럭이다. 표를 사서 들어서면 청량한 비밀의 숲이 펼쳐진다.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 제주 빵지 순례편에 등장했던 동네 빵집 ‘송당의 아침’도 차로 불과 10분 거리다. 우유 큐브 식빵, 제주 우도 땅콩 식빵, 얼그레이 크랜베리 식빵을 사서 나오는데 왠지 드라마 주인공 이나영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귀포시 안덕면 본태박물관은 한국 전통공예의 미래가치를 탐색하는 품격 있는 공간이다. 서양인 관광객이 눈에 많이 띄어 반가웠다. 조선 시대 양반가 부녀자가 신던 당혜에도, 옛 베개에도, 책가도에도 꽃자수와 꽃그림이 있었다. ‘아, 여기에도 꽃이 피었구나.’ 이곳에서는 상설 전시 외에도 이달 말까지 현대미술의 거장 구사마 야요이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제주는 갈수록 본연의 스토리를 담아내고 있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의 ‘해녀의 부엌’도 좋은 예다. ㈜해녀의 부엌은 2019년부터 지역 공동체(해녀)와 청년 문화인들이 합심해 식사가 있는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번에 관람해 보니 87세 제주 해녀 김춘옥 할머니의 인생 스토리를 청년 예술인들이 펼치는 연극, 해녀들이 잡은 뿔소라와 군소 등 해산물 뷔페, 김 할머니에 대한 관객 인터뷰로 진행됐다. 청년 손님들이 해녀에 그토록 관심이 많은 줄 몰랐다. 노쇠한 공동체가 어떻게 살길을 모색해야 하는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틀 동안 제주의 하늘빛이 수십 번 바뀐 것 같다. 그때마다 바다와 숲, 꽃잎의 색도 따라 일렁였다. 알 수 없는 인생, 그래서 겸허함을 배우게 되는 것이 여행의 가장 큰 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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