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어도 못 버린다… 소유의 고통[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최고야 기자 2024. 2. 3.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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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끼고 사는 사람들 심리
필요 이상 잡동사니 모으고 쌓아… 강박 성향에 여러 심리기제 작용
“낭비 절대 안해” 엄격한 완벽주의… 물건 버리면 불안과 죄책감 느껴
하찮은 것에도 의미 부여-애착… “불쌍해서 못버려”의인화 경향도
60대 주부 김정선(가명) 씨는 최근 20년 넘은 김치냉장고를 두고 딸과 다퉜다. 새로 산 김치냉장고가 배달되던 날, 김 씨가 기존 냉장고를 버리지 않고 베란다에 두겠다고 고집한 게 빌미가 됐다. 딸을 비롯한 가족들은 소음이 심하고 전기 효율도 떨어지는 낡은 냉장고는 당장 버리자고 했다. 하지만 김 씨는 “왜 아까운 것을 버리느냐”고 버럭한 뒤 베란다 한켠에 자리를 마련했다. 그곳에는 이미 낡은 믹서기부터 선풍기, 청소기, 러닝머신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집안 곳곳에도 김 씨가 모아 둔 책, 신문, 장식품, 종이가방 같은 잡동사니가 가득하다.

김 씨처럼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까워서” “멀쩡한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요즘처럼 물질이 풍요로운 시대라도 함부로 버리기 아까운 물건이 있기 마련이다. 추억이 깃든 것이라면 더욱 쉽지 않다. 그러나 짐을 정리하고 싶어도 물건을 버리는 일이 괴롭게 느껴지거나, 무엇을 버려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수준이라면 왜 그런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잡동사니로 인해 가족들이 불편해한다면 반드시 되짚어 봐야 한다. 왜 이렇게 아까운 게 많고, 마음이 쓰여 버리지 못하는 게 많은 걸까.

●“언젠간 꼭 필요” 100% 확신 없인 못 버려

단순히 ‘짠순이’ ‘짠돌이’라고 여겨지기 쉽지만, 이들의 마음속에는 생각보다 복잡한 작용이 일어난다. 잡동사니를 끼고 사는 사람들을 30년 이상 연구한 랜디 프로스트 미국 스미스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저장 강박’으로 설명한다. 저장 강박이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과도하게 쌓아두는 행동을 말한다. 아까워서 못 버리는 사람들이 전부 저장 강박증에 걸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을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을 만한 연구 내용이 많다.

관련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이들은 ‘절대 낭비하지 않겠다’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완벽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완벽주의 성향 사람들은 언제나 100%를 지향한다. 당장은 쓸모가 없더라도 100% 쓸모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물건을 버리지 않는다. 이를 거스르고 멀쩡한 물건을 버렸을 때 낭비했다는 생각에 빠지고, 죄책감과 찝찝함을 느낀다.

이들은 ‘언젠간 꼭 쓸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품고, 아주 작은 쓰임새라도 있을 것 같다고 판단되는 물건은 일단 보관한다. 이렇게 아껴뒀던 물건 중에 한 번이라도 요긴한 사용처를 찾는 경험을 하면 “역시 내 말이 맞았어”라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저장 행동을 강화한다.

여기에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완벽주의 성향과 불안감이 더해지면 버려도 된다는 확신을 갖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물건을 실수로 버리는 일도 낭비에 해당하며 이 역시 죄책감을 일으킨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물건이 쌓이는 속도가 버리는 속도를 앞지를 수밖에 없다.

●“추억이 사라질지 몰라”

잡동사니를 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해당 물건을 버리면 그에 얽힌 추억과 경험도 영영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심리학에서는 ‘나(자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로 결정되는 물질적 자아(material self)가 있다고 본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나라는 존재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나에게 의미 있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행위 역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잡동사니를 끼고 사는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하는 물건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사소한 물건을 처분할 때도 자신 일부가 사라지는 일처럼 여기고, 남에겐 쓰레기에 불과한 것에도 집착한다. 해외여행에서 사용했던 지하철 탑승권이나 영수증 등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기념품처럼 모은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소중한’ 물건을 잘 보관하기보다는 집구석 어딘가에 방치해 두기 일쑤라는 것이다.

신문, 잡지, 책같이 정보가 들어 있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를 처분하면 그 안에 있는 정보를 영영 잃게 된다는 생각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주 찾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는 디지털 분야에서 저장 강박 증세를 다루는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수년 치 이메일을 삭제하지 않거나, 어느 폴더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각종 파일을 외장하드에 통째로 저장하는 이들이 연구 대상이다. 이들도 마찬가지다. 데이터를 함부로 삭제했다가 관련 정보를 영영 잃어버리거나, 언제 필요할지 모르는 정보를 없애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산다.

● 물건에 위안 느껴… 외로운 걸지도

잡동사니에 묻혀 사는 사람은 마음이 공허하고 외로운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 심리학과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일수록 외로움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이 조사한 성인 1080명 가운데 물건을 못 버리는 성향이 있는 이들 중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77.7%에 달했다. 반면 물건을 버리는 데 문제없는 이들 중에서는 36.8%에 불과했다.

연구팀은 사회적으로 고립돼 외로움을 많이 느낄수록 사람 대신 물건에 애착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건이 외로움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 연구팀은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습관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물을 의인화하는 경향도 보인다. 2001년 개봉한 영화 ‘캐스트 어웨이’ 주인공 척 놀랜드(톰 행크스)가 대표적이다. 혼자 무인도에 조난된 그는 떠내려온 택배 상자에 들어 있던 배구공에 눈 코 입을 그린 뒤 ‘윌슨’이란 이름을 지어주고 친구로 삼는다. 폭풍우가 몰아친 후 윌슨이 바다에 떠내려가자 그는 자식을 잃은 듯 절규한다.

버리는 물건에 안쓰러움을 느낀 적이 있다면 물건을 의인화한 것이다. “오래 썼는데, 버리려니 미안하네” “이 아이가 쓰레기 폐기장으로 가는 긴 여행을 하다 결국 묻히겠지”라며 감정이입을 한다. 그래서 특별히 소중한 물건이 아니어도 불쌍한 마음에 버리기를 어려워한다.

● 노인 중에 많아… 심하면 강박장애

국내 연구사례는 아직 없지만 해외에서는 물건을 못 버리는 성향의 노인층이 젊은 층보다 약 3배 많다는 연구 결과가 적잖다. 특히 혼자 사는 경우에 두드러진다. 사회생활 빈도가 줄어들고 교류하는 대인 관계 폭이 좁아지면서 이런 성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2017년 국제학술지 ‘노인정신의학’에 소개된 연구에 따르면 잡동사니를 쌓아두고 사는 성향은 40세 전부터 조금씩 조짐을 보이다가 55세 이후 급격히 증가한다. 은퇴 등으로 사회적 관계에서 점차 고립되는 것과 관련 있다. 이 중에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저장 강박은 대부분 용인할 수 있는 수준에서 그친다. 하지만 저장 강박 수준이 심각하다면 쉬이 넘길 일이 아니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DSM-5)에선 2013년부터 강박장애 일종인 저장장애로 분류할 정도다. 집을 온통 쓰레기로 채우고 사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평생 유병률은 2∼6%다. 이런 수준이면 치료가 쉽지 않다. 증상은 같지만 각자 발병 원인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치료자가 짐을 하나씩 같이 처분하며 도와줘도 정리가 어렵다.

아직 병리적 수준이 아니라면 당연히 희망은 있다. ‘저장장애’ 저자 유성진 한양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새로운 물건을 들여놓는 경우 기존 물건을 버리는 원칙을 지키는 ‘선입선출(先入先出)’ 규칙을 지켜 물건 총량을 제한하는 방법이 실용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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