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내 앞서 뭐하는 짓이야!” 호통에도…남편이 고집한 행동은[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2024. 2. 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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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편 : 90. 클로드 모네]
<동행하는 작품>
임종을 맞은 카미유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
양산을 든 여인
.
편집자 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죽은 아내를 그리다
클로드 모네, '임종을 맞은 카미유'(일부 확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그녀는 눈을 감고 있다.

그간 가쁜 숨을 내쉰 듯 입은 살짝 벌어져 있다. 열이 심했는지 얼굴은 수건으로 꽁꽁 싸매고 있다. 흰 천 위 올려진 몸은 뻣뻣한 고목 내지 단단한 화석 같다. 가슴팍에는 희고 빨간 무언가가 놓여있다. 애도를 위한 꽃 뭉치다. 그렇다. 이 여성은 막 숨을 거뒀다. 길고 깊은 밤을 견딘 그녀는 끝내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1879년, 9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1847~1879)였다. 고작 서른두 살, 사인은 자궁암이었다.

한 사내가 그런 그녀 옆에서 그림을 그렸다.

까끌까끌한 볼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을 연신 훔치는 이 남자는, 캔버스 위로 집요하게 붓질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카미유의 남편이었다.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였다. "자네, 지금 설마…." 추모를 위해 찾은 친구의 눈에 들어온 건 그런 광기에 찬 모네였다. "어떻게…. 죽은 아내를 두고 또 그놈의 그림이나 그리는가!" 그는 모네의 붓을 낚아채 부러뜨릴 기세로 타박했다. "제발, 날 가만히 두게." 모네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턱을 살짝 들고선 허공에 말하듯 중얼거릴 뿐이었다. "내가 그간 그녀에게 해준 건 이것밖에 없네." 모네는 숨을 재차 고른 뒤 토해내듯 말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그녀를 그려주고 싶어."

클로드 모네, '임종을 맞은 카미유'(일부 확대)

훗날, 모네는 이 그림에 '임종을 맞은 카미유'라는 제목을 붙인다.

카미유를 향한 사랑, 카미유에 대한 후회로 범벅이 된 작품이었다. 모네는 식어가는 현실의 카미유, 그리고 굳어가는 캔버스 속 카미유를 거듭 번갈아 쳐다봤다. 마침내 붓을 내려놓고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다. 모네는 이 그림에 평소라면 하지 않을 표식을 더했다. 그것은 화폭 우측 아래, 묶은 풍선 내지 마지막 잎새처럼 그려넣은 검은색 하트였다.

모네는 이 그림을 수십년간 자기 방 밖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가 붙잡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늘 자기 곁에 뒀다. 언젠가 가슴이 처연해질 때, 끝끝내 그리움에 사무칠 때면 조용히 꺼내 혼자만 보고 있었다. 모네에게 카미유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둘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눈물겨운 결과물이 생긴 걸까.

집안의 반대
클로드 모네, '자화상'

1865년, 프랑스 파리. 스물다섯 살의 모네는 몽마르트 언덕 작업실에서 카미유와 처음 마주했다.

모네는 부유한 도매상 아버지 밑에서 자란 파리 청년이었다. 나는 귀부인과만 사귄다는 식의 별 자존심을 부리던 혈기왕성한 화가였다. 반면, 카미유는 리옹의 가난한 상인 집안에서 난 소녀였다. 많이 가진 적도, 많이 가지려고 한 적도 없는 수수한 열여덟 살 모델이었다. "카미유는 굉장히 헌신적인 모델일세. 그리고…." 모네의 절친 프레데릭 바지유(Frédéric Bazille·1841~1870)가 그에게 카미유를 소개했다. 하지만 모네는 진작부터 바지유의 말 따위 듣고 있지 않았다. 모네는 이미 카미유의 깊은 눈에 빠져 헤엄치고 있었다. …귀부인이니, 있는 집 딸이니 그런 건 다 의미없는 것이었군. 그는 그간의 엉뚱한 신념이 얼마나 덧없었는지를 절감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제 그녀뿐이었다.

클로드 모네,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

모네는 카미유를 행운의 요정 보듯 봤다.

둘이 만나고서 한 해가 흐른 1866년, 모네는 회심의 그림을 살롱전(展)에 내놓았다. 검은색 줄무늬 드레스를 입은 카미유가 담긴 그림이었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 화폭 속 감각적 색상 배치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모네도 모네지만, 카미유가 무거운 겉옷, 불편한 드레스를 입고 긴 시간 견뎌준 덕에 나온 결과물이었다. 제목은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좋게 봤다. 매겨진 그림 값도 썩 괜찮았다. 당시 모네는 무명 화가였다. 화단의 눈길을 끌 한 방이 절실했다. 카미유가 등장한 이 작품이 딱 그런 역할을 한 격이었다.

클로드 모네, '정원의 여인들'

모네와 카미유는 1867년부터 같이 살기 시작했다.

모네는 앞으로도 카미유를 그리고, 이를 팔고, 그 돈으로 함께 행복하게 살 생각이었다. 그 사이 카미유의 배도 불러왔다. 모네는 그를 쏙 빼닮은 아이와 가정을 꾸리는 장밋빛 미래도 꿈꿀 수 있었다. 모네는 이쯤 '정원의 여인들'을 그렸다. 화사한 햇빛 아래 형형색색 꽃을 쥔 정원 속 여인들이 눈길을 끈다. 모네는 구도를 맞추기 위해 멀쩡한 땅에 참호까지 팠다. 뙤약볕 아래 선 카미유도 모네의 요구를 충실히 따랐다. 그림 속 등장하는 모든 여인이 카미유였다. 그녀가 머리 모양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고, 자세를 달리 취하며 거듭 모델로 나선 것이었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작업도 많이 하고 있지요." 모네가 이 무렵 지인에게 쓴 글이었다.

그러나 격랑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무엇보다 모네의 부모가 가장 큰 시련을 안겼다. 이들은 모네의 결혼을 허락치 않았다. 더 구체적으로는, 카미유와의 결혼만큼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주의였다. 두 사람은 카미유의 볼품없는 출신과 직업을 문제로 삼았다. 이들은 카미유를 몸 파는 거리의 여인과 동급으로 봤다. 절망한 모네는 그녀가 당신들의 손자를 품고 있다고도 말했지만, 차갑게 식은 분위기는 결코 풀리지 않았다. "다 필요없고, 당장 그 여자와 헤어지지 않는다면…." 외려 모네는 부모의 화만 더 사고 말았다. "네 녀석 잘 되라고 매달 준 용돈, 앞으로 보내지 않겠다." 대화는 이것으로 끊겼다.

가난한 사랑
오귀스트 르누아르, 모네 부인과 그녀의 아들(카미유 동시외와 장)

모네는 이 협박에 물러서지 않았지만, 부모 또한 이 경고를 물리지 않았다.

1870년, 모네와 끝내 결혼식을 올렸다. 조촐한 행사였다. 선배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가 증인이었다. 카미유 피사로 등 동료 화가 몇몇이 소박한 꽃다발을 줬다. 그러나 이뿐이었다. 부모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되레 기다렸다는 듯 지원금을 정말로 싹 다 끊어버렸다. 모네는 갑자기 빈털터리가 됐다. 당장 아내 카미유와 아들 장을 돌봐야 했지만 돈 나올 구석을 찾지 못했다.

클로드 모네, 'Spring time'

모네는 그가 점친 장밋빛 미래처럼 카미유를 열심히 그렸다.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처럼 비싸게 팔릴 새로운 그림을 만들고자 애썼다. 하지만 '정원의 여인들'을 비롯해, 어떤 작품도 호평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간 모네의 밀린 집세는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이에 모네와 카미유는 며칠간 맹물만 마신 때도 있었다. 찬 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두 사람과 장이 한 이불을 덮은 채 몸을 웅크렸다. 서로가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면 추위와 허기, 가난 또한 독감처럼 찰싹 달라붙곤 했다. "(…) 장은 통통하고 예쁜 아이야. 무척 귀엽기도 해. 그런데 말이야. 음식 하나 없이 있는 애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일세." 모네가 장의 대부로 나선 바지유에게 쓴 글이었다. 지독한 날들이었다. "아버지의 반대보다 카미유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행복해." 모네는 불과 몇 년 전에 이런 말을 했다. 하지만 그에게 바짝 붙은 현실은 훨씬 더 냉혹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언젠가 모네는 센강에 뛰어든 적도 있었다. 진심으로 죽을 각오였다. 뒤늦게 정신이 든 그가 필사적으로 헤엄친 덕에 겨우 살 수 있었다.

클로드 모네, 'Meditation. Madame Monet on the Sofa'

이처럼 절망의 덤불에 갇힌 모네에게 귀인이 등장했다. 이름은 폴 뒤랑뤼엘(Paul Durand-Ruel·1831~1922)이었다.

그는 모네보다 아홉 살 많은 화상이었다. 모네가 그를 만난 건 바다 건너 이국 땅이었다. 모네 가족은 혼인 신고를 마친 후 잠시 영국 런던으로 간 적이 있었다. 명분은 신혼여행이었다. 사실은 보불전쟁(普佛戰爭)에 따른 징용을 피하기 위한 행보였다. 안 그래도 쉽지 않은 삶의 여정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가장이 군에 끌려가면, 남겨진 카미유와 장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불보듯 뻔했다. 모네가 런던의 한 골목에서 뒤랑뤼엘과 만날 수 있었다. 이는 모네를 안쓰럽게 여긴 피사로의 소개 덕이었다. 뒤랑리엘은 그 시절 흔치 않은 선구안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 비쩍 마른 사내가 건넨 그림들을 찬찬히 뜯어봤다. 뒤랑뤼엘의 눈동자가 차츰 커졌다.

에두아르 마네, 'The Monet Family in Their Garden at Argenteuil'

"…왜 이렇게 그렸소?"

뒤랑리엘이 모네에게 물었다. "여기 흐릿한 선은 뭐요? 이쪽에 색이 번지고 흩어지는 건 왜 그런 거요?" 그는 캔버스가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빛이오." "빛?" "내가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의 빛을 포착해 화폭에 담았소." "그게 무슨 뜻이오?" 뒤랑뤼엘이 콧수염을 매만지며 재차 물었다. "그날 그 시간 빛의 양, 그리고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대상을 포착해 그렸다는 뜻이오." 무심한 듯 친절한 모네의 답이었다. 뒤랑뤼엘은 그제야 화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이름이 뭐라고 했소?" "클로드 모네." "파리의 그 문제아와 이름이 비슷하군." "에두아르 마네 선생? 가끔 듣는 말이오." "아무튼, 자네를 기억해두겠소." 뒤랑뤼엘의 말은 진심이었다. 얼마 후 그는 계시를 받은 양 모네의 그림을 잔뜩 사들이기 시작했다. 프랑스로 돌아간 이 화가가 파리 근처 아르장퇴유에 집을 구하도록 알아봐주기도 했다.

병들어간 그녀
클로드 모네, '양산을 든 여인(카미유 동시외와 장)'

1875년, 모네는 아르장퇴유의 반듯한 들판에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온화한 햇빛, 목덜미를 간질이는 바람, 싱그러운 풀 냄새…. 사랑하는 카미유와 장이 이 모든 걸 품은 언덕 위를 정답게 걷고 있었다. 모네는 울컥했다.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기분이었다.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자, 보고 있는데도 이미 그리움이 솟구치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모네는 붓을 쥐었다. 그림 한 점을 휘리릭 그리곤 '양산을 쓴 여인'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화폭 속 양산을 쥔 흰색 옷차림의 카미유는 천사 같았다. 앙증맞은 밀짚모자를 쓴 장은 숲속의 장난꾸러기 요정을 떠올리게 했다. 흰 구름과 어우러진 파란 하늘, 억세고 가냘픈 풀과 꽃들의 조화는 동화적 분위기를 안겼다.

클로드 모네, 'Madame Monet wearing a kimono'

모네가 이처럼 화사한 그림을 즐겁게 그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쯤 그는 그토록 바란 호시절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이 드디어 팔리기 시작했다. 뒤랑뤼엘에 이어 다른 사람들도 그에게 차츰 눈길을 줬다. 유명 미술품 수집가인 에르네스 오슈데 등 거부들마저 관심을 두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돈을 끌어안은 모네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간 고초에 대한 보상 심리였을까. 모네는 물 쓰듯 돈을 썼다. 그는 비싼 가구와 희귀한 식물을 마구 사들였다. 카미유를 위한다며 가정부를 막 뽑는가 하면, 식구의 한 끼 식사를 위해 고급 식재료를 잔뜩 사오기도 했다. 카미유는 그런 모네에게 여전히 헌신적이었다. 가장의 결정을 늘 존중했다. 가정부가 있는데도 집안일을 도맡아 할 만큼 내조 또한 놓지 않았다. 모네는 이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다. 의뢰에 맞춰 그림만 척척 갖다주면, 앞으로는 더 좋아질 일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우선 모네의 후원자 역할을 한 뒤랑뤼엘이 파산에 가까운 재정난을 겪었다. 모네의 수입은 순식간에 절반 이상 깎였다. 얼마 안 돼 모네의 든든한 뒷배였던 부자 오슈데가 정말 파산을 해버렸다. 절반 넘게 깎인 모네의 수입은 다시 반토막 신세를 면치 못했다. 난감한 일은 또 있었다. 벌거숭이가 된 오슈데는 그의 부인 알리스와 여섯 아이를 두고 잠적했다. 어쩌다보니 모네가 이들을 식솔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다시 가난의 그림자가 깔렸다. 카미유는 이번에도 모네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클로드 모네, 'Madame Monet Embroidering'

불행이 재차 뒤룩뒤룩 살을 찌우기 시작했다.

늪에 빠진 모네를 쓰러지게 한 최악의 상황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카미유의 몸 상태였다. 사실, 모네와 사귄 뒤부터 카미유의 건강은 눈에 띄게 악화하고 있었다. 일단 마음 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모네의 부모와 친척, 심지어 그의 동료들에게까지 수시로 모진 말을 들어야 했다. 풀 곳이 없으니 그럴 때마다 상처를 홀로 핥아야만 했다. 그런 카미유는 모네와 교제 중 낙태도 겪었다. 후유증은 좀처럼 옅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착실히 무너지고 있었다. 결국 1878년, 둘째 아들 미셸을 낳고서는 침대에서 혼자 일어나질 못했다. 의사는 수술을 권했다. 하지만 돈이 들어오는 족족 다 써버린 모네는 수술비를 구할 수 없었다. 그는 뒤늦게 여기저기서 빚을 끌어들였지만, 그녀의 치료비를 대기에는 늘 턱없이 부족했다. 카미유는 분명 출중한 모델이었다. 외모도 고상했고, 마음씨도 따뜻했다. …끝내 내 손을 잡지 않았다면, 어쩌면 귀공자 같은 화가 내지 후원자를 만날 수도 있었을텐데. 그러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었을텐데. 이는 모네가 수백번은 한 생각이었다. 진작부터 크게 성공했다면 그녀에게 애초 이런 병이 오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건 모네가 수백번 가슴에 새긴 뒤늦은 후회였다.

클로드 모네, '임종을 맞은 카미유'

카미유의 건강은 알리스가 한 지붕에 들어온 후부터 더욱 악화했다.

병석에 누운 카미유는 모네와 알리스 사이 움트는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남편 없는 여인이 병든 아내가 있는 사내와 같이 산다는 소문이 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카미유는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그녀는 알리스에게 생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양보하듯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그녀는 영원히 기도를 이어가는 성녀 같았다. 모네는 필생의 연인이자 최고의 뮤즈를 허무하게 잃었다. 모네는 그런 그녀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애도를 표했다. 그게 그림이었다. "불쌍한 제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 선생님. 하나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이 편지에 차용증과 돈을 함께 부칩니다. 그러니 예전에 제가 담보로 맡긴 목걸이를 찾아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 메달은 카미유가 갖고 있던 유일한 기념품이었습니다. 그녀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기 전, 목에 걸어주고 싶습니다." 그는 카미유를 땅에 묻기 전 그녀가 좋아했던 목걸이도 되찾아 다시 걸어줬다.

차마 못 그린 얼굴
클로드 모네, '양산을 든 여인 II'

모네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카미유가 죽고 7년이 흐른 1886년, 그는 또 들판에 자리를 깔고서 언덕 위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있으면 될까요?" 지금 양산을 들고 있는 여인은 알리스의 딸 쉬잔이었다. "좋아, 아주 좋아." 모네는 쉬잔이 입을 더 떼기도 전에 그녀를 격려하며 말을 끊었다. 모네는 쉬잔 또한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붓질을 할수록 가슴 속 먹먹한 무언가가 분출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쉬잔을 보다보면 능숙하게 자세를 잡고, 인내심 있게 작업을 기다리던 카미유가 거듭 떠올랐다. 온통 그녀뿐이던 산과 들을 또 생각했다. 그는 끝내 화폭 속 얼굴을 채우지 못했다. 표정을 칠하지 못했다. 누구도 카미유를 대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새로 그린 '양산을 쓴 여인'은 그렇게 생기있는 배경 속 서글픈 뒷맛을 남기게 됐다.

클로드 모네, 'Camille on the Beach in Trouville'

모네 특유의 화사한 그림들이 마침내 모든 이의 마음을 녹였다.

삶 자체가 롤러코스터였던 모네는 또다시 보란 듯 성공했다. 그간 겪은 반짝 성과가 아니었다. 이번 성공은 과거의 그 어떤 결실보다 큰 것이었다. 모네는 1883년, 식솔을 이끌고 지베르니 마을의 큰 마당이 딸린 저택으로 이사했다. 모네는 그곳에 평생 소원이던 정원을 꾸몄다. 온갖 희귀한 식물을 다시 끌어모았다. 10년 후에는 땅을 더 사들여 연못도 팠다. 수련과 아이리스, 여러 수생 식물을 심고 가꿨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아치형 다리도 깔았다. 그는 이제 아무 걱정 없이 정원사만 여섯 명을 둘 수 있었다. 미술계 인사들과 후원자를 매일 밤낮 초대해도 문제 없었다. 그만큼 돈이 많았다. 그는 어느새 당대 화가 중 가장 부자로 꼽힐 만큼 돈을 쓸어담고 있었다.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모네는 청춘의 시절을 카미유에게 바쳤다.

하지만 청춘을 다 끌어모아 얻은 결실은 알리스와 나눠야 했다. 이제 모네 집의 안주인은 알리스였다. 카미유가 죽고 사실혼 관계를 이어간 둘은 1891년에 결혼했다. 없는 집안의 딸 카미유와 상류층 출신 알리스는 너무 달랐지만, 두 여인 다 모네를 아끼는 마음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클로드 모네, 'The Water Lily Pond'

말년의 모네는 백내장으로 거의 시력을 잃었다.

이쯤 그는 말없이 정원에 나가선 밤낮 구분없이 수련을 그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무장한 독일군이 불과 60㎞ 거리에 있을 때조차 정원에서 수련 그리기에 몰두했다. 모네는 1926년 12월5일에 폐암으로 죽었다. 86살 나이였다. 카미유가 죽고 47년이나 흐른 때였다. 늙은 모네는 젊은 카미유를 만났을까. 혼자 간직하고 있던 '임종을 맞은 카미유'를 그녀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카미유는 무슨 말을 했을까. 둘은 그림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보며 그저 눈물만 글썽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 자료〉

Monet, Christoph Heinrich, Taschen

Monet, 소피 포르니-다게르, 열화당

그리다, 너를, 이주헌, 아트북스

2022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로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특별전을 선보이며 지금도 ‘퍼스트 펭귄’으로 도전과 실험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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