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다녀온 증거였던 우미관, 첫 한국영화 상영한 단성사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K무비의 성지
“조선의 활동 연쇄극이 없어서 항상 유감히 여기던 바 신파 활동사진을 경성의 제일 좋은 명승지에서 박아 흥행할 작정으로, 본인이 5000원의 거액을 내어 본 월 상순부터 경성 내 좋은 곳에서 촬영하고 오는 27일부터 본 단성사에서 봉절 개관”(매일신보 1919.10.26.)
당시의 광고문이다.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는 단성사 사주 박승필(1875~1932)이 출자하고 신파극단 신극좌(新劇座)를 이끌던 김도산(1891~1921)이 각본, 연출해 종로 단성사에서 개봉한 우리나라 최초의 활동사진 연쇄극(連鎖劇)이다. 연쇄극은 키노 드라마(kino drama), 즉 연극과 영화를 함께 보여주는 양식이다. 연극 무대 중에 스크린을 설치해 야외 장면을 필름으로 촬영해 보여주는 것이다. ‘의리적 구토’는 서울의 명승지(청량리·노량진·남대문·장충단·한강)와 기차·전차·자동차·철교 등을 배경으로 한 활극을 촬영한 뒤 연극 도중에 스크린으로 띄워 관객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의리적 구토’ 주인공 송산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핍박을 받으며 자란다. 재산을 탐내는 계모의 계략으로 송산은 집을 나와 죽산과 매초를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계모는 송산을 제거하려고 나서며 둘의 갈등이 깊어지고 마침내 송산은 계모 일당을 물리치고 가문을 지킨다는 줄거리다.
북촌은 조선인, 남촌은 일본인 중심 극장
1901년 황성신문에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신기함에 정신이 팔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참으로 묘하다고 찬탄하여 마지않는다’는 기사가 나온다. 광고로 직접 확인되는 것은 1903년 6월 23일 황성신문에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밤 8시부터 10시까지 동화 10전을 받고 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내용이다. 매일 밤 인산인해를 이뤄 수익금이 백여 원에 이르렀다. 상영한 활동사진은 극적인 구성이 없는, 서양의 도시 풍경과 빼어난 경치를 담은 파노라마였다. 그럼에도 이채롭고 모던한 풍경과 신기하게 ‘움직이는 사진(motion picture)’ 그 자체, ‘볼거리로서의 영화’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열광했던 것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인 이주가 많아지며 일본인 상권과 주거지 및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주로 청계천 남쪽인 오늘의 충무로·명동·을지로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1907년에 이미 가부키 공연을 위한 극장, 경성가부키좌(歌舞伎座)가 지금 신세계백화점 근처에 들어섰다.
이어 남촌에 여러 일본인 극장이 생겼다. 남촌의 일본인 극장에서는 일본 전통 예능, 가부키, 신파극 등을 공연하는 한편,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일본인 거리였던 남촌에는 경성고등연예관(1910년), 대정관(1912년), 황금관(1913년), 유락관(1915년), 경룡관(1921년), 중앙관(1922년) 등이 있었다. 유락관(有樂館)은 조선의 제국극장을 표방한 활동사진관으로 1919년 기라쿠칸(喜樂館)으로 이름을 바꾸어 해방 직전까지 대표적인 일본인 영화관으로 운영되었다. 일본군 주둔지였던 용산에도 용산좌(龍山座), 사쿠라자(櫻座) 등이 설립 운영되었다.
조선인들의 거리였던 북촌의 경우, 극장은 종로에 밀집했다. 단성사(1907년 설립, 1918년 활동사진관으로 재개관), 우미관(1912년), 조선극장(1922년)이 유명했다. 탑골공원 좌측에는 신파극 공연으로 유명했던 연흥사(1907~1915), 각종 공연과 집회의 장소였던 장안사(1908~1915) 등이 있었다.
을지로 2가 동양척식주식회사 근처에 최초의 활동사진 전용관인 ‘경성고등연예관’이 일본인에 의해 1910년에 설립됐다. 언어와 문화, 전통 장르 차이로 조선인 극장과 일본인 극장이 구분되던 당시에 경성고등연예관은 특이하게도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객을 동시에 수용하였다. 일본인 변사와 조선인 변사가 번갈아 가며 영화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필름을 영사했다.
‘장화홍련전’ 한국인 첫 극영화 촬영 성공
1912년 이후 조선인 관객을 위한 활동사진관 우미관이 종로에 들어서고, 일본인 관객을 위한 활동사진관 다이쇼칸(大正館, 1912~1935)과 고가네칸(黃金館, 1913~해방 후 국도극장)이 남촌 을지로 4가에 세워졌다.
우미관(優美舘)은 1912년 종로 관철동에 설립된 영화관으로서 1000명 이상 수용 가능했다. 우미관은 1916년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특약을 맺고 유니버설 영화를 독점 상영해 ‘명금’, ‘카추샤’, ‘몬테크리스토 백작’, ‘파우스트’ 등을 상연했다. “우미관 구경 안 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할 정도로 우미관은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우미관 주변 관철동엔 음식점과 선술집 등이 밀집해 있어서 많은 인파가 붐볐다. 주먹으로 유명한 김두한은 우미관을 중심으로 활동한 바 있다. ‘말하는 활동사진, 관철동 우미관에 처음 상영’(동아일보 1926.2.28.)했다는 건 영화사적으로 주목할 사실이다. 한국에서 무성영화가 아닌 발성영화(토키, talkie)를 처음 상영한 곳이 우미관이었다.
조선극장은 1922년 10월 종로 인사동 입구에 영화상설관으로 개관했다. 1923년 조선극장 주인 일본인 하야가와(早川孤丹)가 ‘춘향전’을 만들면서 조선에서 영화 제작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단성사 사주 박승필은 단성사에 촬영부를 설치하여 ‘장화홍련전’을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한국 극영화 촬영·현상·편집 성공이었다. 조선극장에서는 영화 상영 외에도 신파극, 신극, 가무, 기예가 공연되었다. 특히 연극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를 갖추어서 토월회의 정기공연, 극예술연구회 공연이 조선극장에서 올려졌다. 1937년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단성사(團成社)는 한국 영화의 태생지로 불리는 곳이다. 단성사는 서울의 실업가 지명근, 주수영 등이 공동 출자해서 1907년 종로 묘동(종로 3가)에 설립한 극장으로 각종 연희를 공연했다. 단성사의 경영권과 소유권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를 오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단성사는 1913~14년 서양식 외관과 일본극장식 실내구조를 갖춘 1000석 규모로 신축했다. 1918년 광무대(光武臺) 경영자 박승필이 단성사를 인수하여 신축하고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상설 영화관으로 재탄생했다.
박승필은 광무대를 통해 전통 연희를 공연하는 동시에 영화를 상연하는 조선 엔터테인먼트 중심 인물이 되었다. 박승필의 출자로 김도산 등 한국인들에 의해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만들어져서 단성사에서 1919년 10월 27일 개봉됨으로써 훗날 ‘한국영화 제1호’로 정해지고, 10월 27일이 ‘영화의 날’로 제정된 것이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정우택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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