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초 달인 국물서 고기맛 ‘채식 육개장’…순하고 깔끔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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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의 맛따라기] 친환경 그로서란트 2곳
그로서란트(grocerant)라는 식생활 매장이 더러 눈에 띈다. 식료품(grocery)과 음식점(restaurant)을 결합한 단어로, 판매한 식료품을 즉석에서 조리해 주거나 준비된 음식을 사서 먹을 수 있는 곳이다. 한자리서 장도 보고 밥도 먹는다는 개념이다. 국내 뉴스에는 이 용어가 2012년 9월 25일 처음 등장했다. 명품관이 유명한 백화점에 그로서란트를 개장한다는 소식이 경제신문을 중심으로 10여 개 신문에 실렸다. 이후 대형 백화점마다 비슷한 매장을 만들어 경쟁했다.
유럽 모델을 들여온 그로서란트에 관해 기사들은 ‘신개념 복합 식생활 공간’이라고 일제히 소개했다. 하지만 우리도 한곳에서 식료품을 사서 가공해 먹는 자생적 그로서란트가 오래전부터 있었다. 정육식당이나 수퍼마켓에서 시작한 전주 가맥(가게맥주)과 을지로 골뱅이 같은 것들이다. 몇 년 새 서양과 한국 방식이 밀고 당기며 발전한 생활형 그로서란트 매장이 주변에 하나둘 생기고 있다. 그 가운데 건강과 천연재료를 특별히 강조하는 두 곳을 소개한다.
채식 육개장은 육류성분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는데 국물에서 고기 맛이 난다. 재료와 조리 과정을 꼼꼼히 확인했다. 유근피(느릅나무 뿌리껍질)·오가피·감초·둥굴레·칡·당귀·구기자·황기 등 8가지 약초를 달여 국물을 만든다. 무농약 나물(토란대·고사리·곤드레)과 버섯(표고·느타리)을 넣고 가마솥에 푹 끓인다. 전통 간장으로 간을 하고, 생강·고추기름과 곡물가루를 살짝 푼다. 재료는 모두 국산인데, 기름만 수입 유채유를 쓴다.
고상한 나물 비빔밥은 놋그릇에 밥을 담고 묵나물(취나물·다래순·곤드레 중 하나), 고사리, 표고버섯, 무나물 볶음을 올린 다음 정선 들기름을 두른다. 손님이 간을 맞춰 비벼 먹도록 맛간장을 따로 내준다. 밥은 자연재배 유기농 백미와 현미(20%)를 섞어 짓고, 맛간장은 거창 전통간장에 다시마·표고·양파·생강·마늘·원당 등 천연재료를 넣고 끓여 만든다. 샐러드·무생채·김부각·과일(한과)과 함께 한상차림으로 나온다. 친환경 김부각은 그냥 먹기보다 부숴서 비빔밥에 넣어 먹는 게 더 맛있다.
모든 음식은 공장제품 소스나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고 전통 장 중심의 간결한 양념으로 자연에 가까운 맛을 내려고 노력한다. 집에서 해 먹어도 이렇게 엄선한 재료로 순수하게 요리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서울 가회동 매장은 미쉐린 가이드(서울) 그린스타에 3년 연속(2021~2023) 선정된 인사동 한식 레스토랑 ‘꽃밥에피다’의 자매점이다. 친환경 식품회사 ㈜네니아에서 2015년 시작해 직영하다가 2020년 8월 외식법인 ㈜꽃밥이야기로 독립해 송정은(54) 사장이 맡아 운영하고 있다.
소고기된장덮밥은 지리산 제철음식학교 고은정 선생이 개발한 조리법을 활용한 대표 메뉴다. 소고기를 전통간장·들기름·후추로 밑간 해서 볶는다. 채소는 감자·당근·양파·버섯·호박 순서로 볶는다. 다시마·양파·대파·파뿌리 달인 국물을 붓고 서로 어우러지게 끓이면서 된장을 풀어 간을 맞추고 전분물을 살짝 둘러 점도를 보탠다. 곡성 미실란 농장 유기농 새청무 9분도 쌀로 지은 밥에 곁들인다.
떡만둣국은 매장 앞 방앗간에서 뽑아온 국산 쌀 가래떡과 네니아 우리밀 왕교자만두로 끓인다. 유기농 한우사골 곰국에 앞의 채소 달인 국물을 섞고, 전통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국산 콩 국간장을 넣어 볶은 소고기 다짐, 동물복지 무항생제 계란 지단 채를 고명으로 올린다. 맛과 차림이 반가음식처럼 음전한 떡만둣국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청룡의 해 설날 아침에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잘 익은 배추김치와 자연식 요리연구가 문성희 선생에게 배운 총각무장김치가 어울려 평화로운 맛의 조화를 엮어낸다.
서울 마포 신수시장 옆에 지난해 8월 문 연 매장을 혼자 지키는 한혜령(59) 대표는 광고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던 중 가족이 하던 음식점을 어쩔 수 없이 떠맡아 4년(2018~2022) 동안 관리했다. 코로나19 시기에 경영이 어려워져 찬모를 내보내고 직접 주방에 들어갔다. 뭔가 제대로 배워야 할 것 같아 제철음식학교로 매달 1박2일씩 1년을 공부하러 다니면서 천연 양념만으로도 음식이 되는 걸 알았다. “국내산, 무첨가물, 천연재료가 음식의 원칙”이라는 한 대표는 “국산 콩으로 빚은 전통 장이 모든 음식의 기본이며, 내가 먹지 않는 음식은 팔지 않는다”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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