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에 가린 일본 침략주의 어두운 그림자
[근현대사 특강] 청일전쟁, 은폐된 진실 ②
경성제국대학 교수 다보하시 기요시는 1930년 『근대 일선(日鮮) 관계의 연구』에서 당쟁망국론의 끝판으로 고종 시대 왕비 민씨 일족과 대원군의 세도정치를 논하였다. 그 뒤 1944년 ‘근대조선에서의 정치적 개혁’이란 장문의 논문에서 ‘갑오개혁’을 처음 등장시켰다. 1894년 6~7월 일본군이 출병하면서 조선 정부에 요구한 ‘내정개혁’이 청일전쟁 개전과 동시에 실행에 옮겨진 것을 ‘갑오(내정)개혁’이라고 불렀다. 그는 ‘갑오개혁’의 의미를 논문 머리에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전쟁의 긴박 속에 개혁 필요성을 자각한 조선 관료의 혁신 분자들이 일본 정부의 전면적 원조를 얻어 (일본제국) 메이지 유신의 홍업(鴻業, 대업)을 본받아 500년 구체제를 타파하고 근대국가의 모습을 정비하려 기도한 사업”이라고 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사업은 (1895년 6월)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가 이한(離韓)한 뒤 버려져 15년 뒤 ‘한국병합’을 초래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한국병합을 두둔하는 식민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개항-개화-개혁 세 가지 구도를 근본부터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고종, 국난 타개 위해 미국에 도움 요청
다보하시 교수의 입론은 광복 후 학계의 연구 활동 자체가 어려운 여건 속에 정설처럼 퍼졌다. 1990년 유영익의 『갑오경장연구』가 처음으로 이에 제동을 걸었다. 유영익은 군국기무처의 개혁안을 분석해 “제한된 의미에서 자율적 개혁 운동이었다”라고 하여 친일 개화파 주도의 개혁이란 종래의 견해에 대한 수정을 제안하였다. 개혁안 총 221건이 모두 국왕의 재가를 거쳤다는 사실에 근거하였다. 일본공사관이 판을 친 것이 아니라 국왕 중심 국정 체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갑오개혁’에 가린 침략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의 고찰로는 개혁 주도 11명 대부분이 1880년 통리기무아문 설립 때부터 개화 업무에 종사한 국왕의 충실한 신하들이었다. 일본공사관 측은 영의정 김홍집을 군국기무처 총재로 앞세워 조종했으나 국왕 중심의 국정 체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다면 고종 시대 ‘세도정치론’도 허구가 아닐 수 없다.
앞 회에서 살폈듯이 고종은 국난 타개를 위해 미국 정부에 도움을 청했다. 왕정 보필에 충실한 신하들도 적지 않았다. 1884년 갑신정변 때 봉변을 당한 민영익은 청·일 양국군 출병 당시 홍삼 무역 총책으로 상하이에 나가 있었다. 그는 일본 정부의 압박 소식을 듣고 고종에게 저들의 요구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여 베트남 망국의 전철을 피하시라는 조언을 보내왔다.
1894년 2월(음력) 갑신정변 주동자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 후 4월 27일 고종은 나머지 갑신정변 연루자 전원에 ‘대(大)사면령’을 내렸다. 그들의 해외 경험과 지식을 국정 쇄신에 활용하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이 사실이 『고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이를 주목한 연구가 없다. 고종은 같은 시기 동학 농민군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근본적인 국정 쇄신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청일전쟁이 터졌다.
이노우에 공사의 ‘20개 조’는 조선이 청국 황제의 연호 대신 ‘개국기년’(1895년=개국 504년)을 쓸 것, 청국과 관계를 특별하게 하지 말 것, 신분제를 없애고 인재를 고르게 쓸 것 등을 제시했다. 고종은 1882년 미국과의 수교 이후 위안스카이와의 갈등으로 청국과의 결별을 속으로 다지고 다졌다. 일본의 요구는 오히려 이를 실현할 호기였다. 신분제도 혁파에 대한 뜻을 세운 지도 오래였다. 1886년 1월 2일 노비 세습 철폐의 뜻을 밝혔다. 고종은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을 세우고 그 아래 외교와 신문물 수용 관련 12개 사(司)를 두었다. 근대화는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 ‘갑오개혁’은 어디까지나 일본제국이 조선에 은혜를 베풀었다는 시혜론이 만든 억지 근대화론이다.
‘2차 개혁’ 초인 1895년 2월 국왕은 백성에게 정부의 뜻을 알리는 조령(詔令)을 한문에서 국한문 혼용체로 바꾸었다. 한글을 국정 소통의 매개로 삼는 일대 변혁이었다. 새 형식의 조령 가운데 1895년 2월 26일(양력) 자의 ‘교육 조령’은 주목할 내용을 담았다. 앞으로 덕양, 체양, 지양 등 3양(養)의 실용 교육에 힘써 “나라의 수모를 씻을, 나라의 원한을 갚을, 나라의 정치제도를 끌어갈 ‘국민’을 창출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하였다. 3양 교육은 19세기 미국 중등교육 강령으로 육영공원 교사 호머 헐버트가 고종에게 전한 것이다. (2023. 12. 23 자 ‘근현대사 특강’) 소학교, 한성사범학교, 각종 외국어학교, 기술학교의 설립을 명하는 조령이 뒤를 이었다. 강압에 대한 탄력적 대응의 성과로서 ‘갑오·을미개혁’이란 용어가 더 바람직하다.
능동 대응 ‘갑오·을미개혁’ 용어 바람직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는 “청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한다”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4월 23일 ‘삼국간섭’으로 전리품 랴우둥(遼東)반도를 포기하면서 일본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5월 21일 이노우에가 적극 지원한 총리대신 김홍집이 사임하고 내부대신 박영효가 대신하였다. 고종은 6월 6일 ‘독립국’을 축하하는 원유회를 창덕궁 연경당 일원에서 열게 하였다. 일본이 명문화한 ‘자주독립국’을 기념행사로 내외에 알려 일본도 이를 범하지 못하게 할 속셈이었다. 기자 출신 기쿠치 겐조의 『근대조선사』(1939)는 행사 일체를 부마 박영효가 지휘하게 하여 ‘박영효의 날’로 불렸다고 밝혔다. 외국 외교관 기업인 등 3000명이 모인 큰 가든파티였다고 했다. 이노우에 공사는 자신의 송별연을 겸한 이 행사 참석을 끝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노우에 공사 귀국 후 일본 측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박영효가 왕비를 폐하려 한다는 거짓 밀고가 궁중에 들어가고 고종은 6월 23일(양력) 법부에 엄하게 조사하여 정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거기에는 체포하란 지시가 없었다. 일본 측의 속뜻을 알아채려 도피의 기회를 준 것일까. 박영효는 실제로 모함을 꾀한 일본공사관 측의 보호를 받으면서 출국하여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서 서재필의 귀국을 종용한다. 한 달쯤 지난 8월에 신임 미우라 고로 공사는 왕비 살해의 밀명을 띠고 부임한다. 새로운 국난의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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