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필요한 고통의 이야기

2024. 2. 2.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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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숄로 모성과 생존을 상징
인간의 조건 새삼 돌아보게 해줘

신시아 오직, ‘숄’(‘숄’에 수록, 오숙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미니픽션 혹은 엽편(葉片) 소설로도 부르는 ‘짧은 소설’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 것 같다. 따뜻하면서 재미있거나, 사색적이고 철학적이거나, 슬프거나 고통스럽거나. 고통스럽다는 건 거의 비극에 가까운 이야기에서 느끼는 감정인데 그런 소설에는 역사적인 내용이 담긴 경우가 많아 보인다.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말이다.
조경란 소설가
신시아 오직의 짧은 소설 ‘숄’을 처음 읽은 날엔 한 번 읽고 책을 그대로 덮었다. 겨우 열 쪽짜리 소설을 읽었는데도 힘이 들었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내용인 데다가 인물들, 특히 아기 어머니인 젊은 로사의 고통이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져서. 한 번 읽었으면 되었다고 여겼다가 며칠 만에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번 네 번. 이 소설을 계속해서 읽게 된 이유는 어떤 숄인가가 한 장 내 손에, 독자의 손에 전달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숄’에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젊은 아이 엄마인 로사, 그녀의 아기 마그다, 열네 살인 깡마른 소녀, 조카 스텔라. 그들은 길 위에 있는데 뼛속까지 춥고 극심한 허기에 시달려 감각조차 없다. 이들은 어디로 가는가. “머리카락은 로사의 코트에 꿰매어 단 별처럼 노란색이었다” “만약 줄 밖으로 나갔다가는 총에 맞을지도 몰랐다”라는 등의 표현으로 이들이 지금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중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로사는 아기를 숄에 둘둘 말아 웅크려 안고 걸었다. 그곳에 도착하면 아기가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줄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 길가의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로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요람처럼 숄로 아기를 보호하는 것밖에 없었다. 로사의 가슴에서 젖이 말라 먹을 게 없는 아기는 리넨으로 만들어진 숄 모서리를 대신 붙잡고 빨았다.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그 숄은 마법의 숄이었다.” 추위를 막아주고 아기가 있다는 걸 숨길 수 있게 해주고 배고픔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그 숄이 끝까지 마법의 숄이 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기는 웃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소리를 내는 법도 모른다. 자신의 안식처가 숄이라는 사실만 안다. 거기서 벗어나고 울음소리를 냈을 때 그들이 도착한 “연민이 없는 곳”의 검은 군화를 신은 사람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지 못해도. 아기가 웃는 것처럼 보일 때는 바람이 숄의 끝자락을 날릴 때뿐이었다. “숄은 마그다의 아기였고, 반려동물이었고, 여동생이었다.” 소리를 내지 못했던 마그다는 그 안에서 15개월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스텔라는 이렇게 말했다. “추웠어요.”

‘숄’을 적어도 세 번은 읽을 수밖에 없게 될지 모른다. 한번은 로사의 시점으로, 두 번째는 아기 마그다, 세 번째는 너무 춥고 배고픈 소녀 스텔라의 시점으로. 숄은 이제 로사에게 남았다. 목숨을 지탱해주었고 음식이 되어 주었고 마그다의 집이었던 숄을 로사는 자신의 입에 쑤셔 넣었다. 울부짖음이 마를 때까지.

이 단편소설은 1980년 ‘뉴요커’지에 발표되어 그다음 해 최고의 단편 소설에 주어지는 오헨리 상을 수상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강렬한 힘에 의해 “받아쓰기하듯 썼다”고 표현했다. 어떤 이야기는 엄선한 자기 경험에서 오기도 하지만 먼 데서 작가의 마음을 두드리는 뜨거운 이야기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 작가는 운명처럼 그 이야기를 받아쓰기하듯 쓰는 경우도 생긴다. 그렇게 신시아 오직의 대표작이 된 ‘숄’은 독자에게 한 장의 숄로 모성과 생존을 상징하는 역사적 기록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놀라고 믿을 수 없어 하다가 2024년인 지금도 같은 시간, 세계 저편에서 전쟁이 진행 중이라는 참혹한 사실을 가끔 잊어버리곤 한다. 너무 따뜻하고 안전한데 혼자만 있을 때,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이라는 걸 거의 하지 않을 때. ‘숄’은 현재도 계속되는 이 비극적 참상이 개인의 삶을 또 어떻게 망가뜨리고 파괴할 것인지, 인간의 조건에 대해 새삼 돌아보게 한다. 이게 소설이 하는 진짜 일이 아닐까.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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