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참전용사와 붉은 동백 이야기

2024. 2. 2.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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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기어코 잘라낸 동백
전쟁터 붉은 피와 무관치 않아
참전용사 명예수당 월 42만원
보은이라고 하기엔 너무 빈약

부산의 어머니 마당에는 두 그루 동백나무가 있다. 붉은 동백과 흰동백이다. 돌아가신 지 10년이 다 된 아버지께서 요양원으로 가기 전에 무슨 일인지 붉은 동백을 잘라버렸다. 그런데 그 동백이 다시 줄기를 키우고 가지를 뻗어 해마다 붉은 꽃을 달았다. 올해도 드디어 첫 꽃을 터뜨렸다. 꽃망울을 단단히 쥐고 있던 동백이 붉고 정연한 꽃을 피운 것이다. 겉 꽃잎은 펼쳐지고 나머지 꽃잎들은 여전히 앙다문 그 붉은 동백의 결연한 모습이 감동적이다.

아버지는 붉은 동백이 마당에 뚝뚝 떨어지는 것을 끔찍해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동백이 올해 첫 꽃을 터뜨린 날, 서랍을 열어보다가 탄성을 질렀다. 오래된 자개장 서랍 안에서 ‘6·25사변종군기장’이라는 원형 메달을 발견한 것이다. 아버지가 전쟁을 겪은 참전용사였다는 사실이 새삼 상기되었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꺼내보니 아버지는 6·25전쟁의 발발과 거의 동시에 입대했다. 1951년 4월 18일에는 전쟁의 일선 지구로 갔는데 삼팔선을 넘어 양양 설악산 고성 금화 화천 아야진 건봉사 등 각 지구 치열한 전투에 참전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지만, 종전이 아니어서 바로 제대하지 못하고 1954년 5월 1일에 제대를 하였다고 하니 아버지는 만 4년 이상의 군 복무를 했다.
천수호 시인
2000년도 초 부산 지역에 6·25참전전우회가 발족하였고 지금은 6·25참전유공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참전 중에 한쪽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평소 사람들과 교류가 거의 없던 아버지였지만, 참전유공자회 사무실은 참으로 부지런히 다녔다. 이곳에 갈 때는 6·25종군기장을 달고 참전용사 캡을 꼭 쓰셨다. 다시 붉은 동백꽃 앞에 서니 아버지의 그때 근거지가 궁금해졌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좇아 음료 한 박스를 들고 미리 통화한 지회장님을 만나기 위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지회의 홍순해 지회장님은 92세였고 홍성태 부회장님은 93세의 고령이었지만, 고맙게도 아버지인 천술암 옛 전우를 또렷이 기억하셨다.

홍순해 지회장님은 낙동강 방어선의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였다는 다부동 작전에 참여했던 전쟁담을 들려주었다. 40일간의 전투에서 실탄을 나르던 군인들이 하루에 50명씩 죽음을 맞았다고 했다. 홍성태 부회장님은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던 북한의 덕천에서의 기억도 꺼내주었다. 중공군은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며 방망이를 들고 내려오는 인해전술을 썼고 그들은 평양에서 수색으로 또한 수원까지 밀고 내려왔다고 했다.

작년 6월 말 기준으로 6·25 참전용사의 생존자 수는 4만6000명이다. 그러나 해마다 1만명 이상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2000년 초에 아버지가 처음으로 참전명예수당을 매월 5만원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더디게 조금씩 올라서 올해부터는 월 42만원의 명예수당을 받게 된다고 한다. “총알이 나를 피하더라니까, 그래서 살 수 있었지. 조상님이 돌봐 주셨던 거야”라고 하시는 홍성태 부회장님이 받기엔 너무 적은 수당이 아닌가.

작년 6월에 참전용사가 마트에서 반찬거리를 절도하다 잡힌 사연을 접하고 여러 곳에서 온정을 보냈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온정은 괜한 부채감이 들기 마련이고, 또 비정기적이어서 국가에서 제대로 지원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기초 생활비로도 턱없이 부족한 월 42만원이라는 수당이 참전에 대한 보은이라기엔 너무도 빈약하다.

아버지께 듣던 참전 이야기를 두 어르신을 통해 들으며 나는 내내 아버지 모습을 겹쳤다. 더구나 내게 행운의 선물이라며 2달러짜리 지폐도 건네주었는데, 모처럼 아버지께 받은 선물인 듯이 노트에 정성스럽게 끼워서 돌아왔다. 마당에 흰동백은 아직 꽃봉오리만 굳게 다물고 있지만 붉은 꽃은 점차 개화의 수를 늘려가며 그 옛날 전쟁터에서 보았던 붉은 피가 저렇게 피고 또 흘렀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아버지가 붉은 동백을 기어코 잘라버렸던 이유도 전쟁 체험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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