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 속출하는 아시안컵, 주인공은 한국·일본만이 아니었다
(시사저널=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카타르에서 열리고 있는 AFC(아시아축구연맹) 아시안컵 축구가 예상 밖의 혼전으로 흘러가고 있다. 우승 후보들이 가시밭길을 걷는 가운데, 주류에서 한참 멀다고 생각했던 팀들이 대이변을 일으키는 중이다. 역대 최고의 멤버를 구성하며 자타 공인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던 한국과 일본의 양강 구도에 맞춰졌던 포커스가 이제는 제3지대 다크호스들에게 옮겨졌다.
조별리그와 16강전을 마친 시점에서 아시안컵 최대 화제는 우승 후보 1·2순위인 일본과 한국의 예상치 못한 고전이었다. 두 나라는 모두 조별리그 1위 등극에 실패했다. D조의 일본이 이라크에 패하며 먼저 조 2위가 확정됐고, E조 결과에 따라 결승에서나 가능하다고 여겨진 최고의 빅매치 한일전이 16강전에서 조기에 이뤄질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도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말레이시아와 비기며 조 2위가 되는 뜻밖의 상황이 연출됐다. 클린스만 감독이 조기 한일전을 피하기 위해 조 1위가 아닌 2위를 택했다는 의심까지 나올 정도였다.
사우디·이라크·UAE 등 중동의 전통 강호들 '탈락'
하지만 한국이 그런 선택을 할 여유는 없었다. 조 2위로 가면 8강전에서 상대보다 이틀을 덜 쉬는 불리한 조건이었고, 16강 상대도 일본 못지않게 까다로운 우승 후보 사우디아라비아였다. 한국의 조 2위는 일본과 사정이 같았다.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실력으로 밀린 결과였다. 한국은 1차전에서 이강인의 원맨쇼로 바레인을 3대1로 꺾었지만, 2차전에서는 요르단과 간신히 2대2로 비겼다. 운명의 3차전에서는 말레이시아에 1대2로 끌려가다 이강인·손흥민의 골로 역전에 성공했지만, 종료 직전 동점골을 얻어맞으며 충격적인 결과를 받았다. 말레이시아는 FIFA 랭킹 138위로 한국보다 111계단이나 낮았다.
일본도 자존심이 상한 건 마찬가지였다. 베트남과의 1차전부터 거센 도전을 받다가 4대2로 힘겹게 역전승을 거둔 일본은 이라크와의 2차전에서 1대2로 패했다. 이라크는 피지컬 경합의 우위와 적극성으로 시종일관 경기를 주도하며 현재 아시아 최강으로 꼽히는 일본을 손쉽게 요리했다. 이라크에 패하며 이미 조 1위 가능성이 사라진 일본은 3차전에서 신태용 감독의 인도네시아를 3대1로 꺾고도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번 대회 6개 조 가운데 최강인 포트1 팀이 순조롭게 조 1위를 차지한 건 4개 조에 불과했다. 포트2의 이라크, 포트3의 바레인이 일본과 한국을 밀어내고 조 1위에 올랐다. 그런데 토너먼트에 돌입해서도 이변의 바람은 꺼지지 않았다. 일본을 잡고 조별리그 3전 전승을 달성해 새로운 우승 후보로 강력하게 떠오르던 이라크가 16강에서 탈락했다. 요르단에 덜미를 잡힌 것이다. 파울루 벤투 전 한국 대표팀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는 UAE도 마찬가지다. 타지키스탄에 무릎을 꿇었다. 카타르와 우즈베키스탄도 각각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팔레스타인과 태국을 만나 1골 차로 간신히 승리하며 8강에 올랐다.
현재까지 최대 이변의 주인공은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이다. FIFA 랭킹 109위에 이번이 아시안컵 첫 본선 참가인 타지키스탄은 탄탄한 조직력과 빠른 공격 전환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조별리그에서 중국과 비기고, 레바논을 꺾으며 16강에 올랐다. UAE와의 16강전에서는 1대0으로 앞서다 후반 추가시간 동점골을 허용했지만 결국 승부차기에서 웃으며 더 높은 곳으로 진격했다.
중동 축구도 격변의 시간을 맞았다. 중동의 맹주 격인 사우디아라비아는 하필 16강에서 한국을 만나는 불운 끝에 탈락했다. 사우디에 도전하는 '2인자' 카타르·이라크·UAE 중에서는 개최국 카타르만 살아남았다. 반면 제3세력인 요르단은 8강에 올랐고, 바레인·시리아·팔레스타인도 16강에 진출했다.
인도와 더불어 향후 아시아와 세계 축구에 새 에너지를 불어넣을 발전소로 주목받는 동남아 축구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가 16강에 진출하며 소기의 성과를 냈다. 신태용 감독의 인도네시아는 일본과 이라크, 거기에 동남아의 새로운 맹주로 떠오른 베트남과 D조에 속했다. 하지만 오히려 베트남을 꺾고 16강행 막차를 탔다. 최근 월드컵 예선에서 고전하며 입지가 흔들릴 뻔했던 신태용 감독은 2007년 이후 17년 만에 아시안컵 16강 진출을 선물하며 다시 영웅이 됐다.
김판곤 감독의 말레이시아는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가운데서도 한국을 몰아붙이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동기부여를 갖기 어려웠지만 말레이시아는 초반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고, 경고 누적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이 컸던 한국은 오히려 주도권을 내줬다. 김판곤 감독은 자신이 떠난 후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체제에서 우왕좌왕하는 한국 대표팀에 강렬한 자극을 줬다. 말레이시아 축구협회는 한국전 무승부에 감화돼 특별지원금을 책정하기도 했다.
유럽파 다수 보유한 한·일, 컨디션 관리에 애먹어
유달리 다크호스가 대거 등장한 이번 아시안컵은 축구에서 규모보다는 질적인 싸움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각인시켰다. 지도자와 선수에 대한 육성·훈련·운영이 얼마나 높은 퀄리티로 이뤄지느냐에 따라 작은 국가 대표팀도 강력한 임팩트를 남길 수 있다. 동남아 축구는 최근 경제 발전을 통해 각 분야의 내실을 강화하는 와중에 뒤처진 축구 인프라와 시스템을 재정비했다. 클럽팀들이 이미 AFC 챔피언스리그 같은 국제전에서 한국·일본·중국 팀들을 꺾는 일이 매년 벌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다른 나라의 성공 모델을 채택했다. 박항서 감독 체제에서 엄청난 도약에 성공한 베트남을 본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가 한국 지도자를 영입하며 비슷한 성공을 낳았다.
혼혈 혹은 이민자 후손을 흡수해 대표팀 전력을 강화하는 시도도 눈에 띈다. 베트남·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는 혼혈 선수가 주요 포지션에 자리했다. 중동 국가들도 전쟁이나 정치적 문제로 인해 해외로 떠난 이들의 후손이 부모·조부모의 나라에서 국가대표로 뛰는 것을 택하는 분위기다. 유럽의 축구 시스템 안에서 성장한 혼혈 선수, 이민자 후손들로 약점을 극복한 것이다.
상대적 약체들이 과감한 변화와 흡수로 발전하는 것과 달리 기존 강호들은 새로운 숙제에 직면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번 대회 내내 주축 선수들의 컨디션과 부상 관리에 애를 먹으며 제대로 된 실력을 선보이지 못했다. 많은 선수가 유럽에서 뛰다 보니 시즌 중 치르는 단기 토너먼트에 쏠리는 부하가 들쭉날쭉한 경기력으로 작용했다. 거기다 한국의 경우 클린스만 감독 체제에서 우려됐던 전술·전략의 총체적 부재를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최고의 선수들로 최악의 팀을 만들었다는 지적을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받는 중이다.
일본은 26명의 선수 중 무려 20명이 유럽에서 뛰고 있지만, 오히려 대표팀에 대한 그들의 마음가짐이 퇴색하고 있다는 우려가 현실이 됐다. 주요 선수들이 이미 대회 전부터 자신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차출된다는 불만을 표출했는데, 실제 경기력도 부진해 의욕적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거기에 최근 대표팀 에이스로 떠오른 이토 준야가 성폭행 혐의로 고소당하는 불미스러운 일까지 벌어져 대표팀의 사기는 한층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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