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래잡기] 화무십일홍
동갑 여성화가 비제 르브룅
딸 잃은 비극과 슬픔 그렸지만
민심 잃은 왕비, 형장의 이슬로
권력은 화무십일홍이지만
실력갖춘 女화가는 승승장구
오스트리아 여제의 막내딸로 태어나 14세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빛나는 미모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과거의 적국 오스트리아의 일원으로서 끊임없는 의심을 받으면서도 화려한 궁중 문화를 이끌며 프랑스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갔지만, 종국에는 큰 정치적 흐름을 읽지 못하고 사라진 여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공주였던 어린 시절부터 왕세자비를 거쳐 왕비가 되는 원숙한 시기까지 그의 성장기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초상화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모두 여러 유명 화가가 그린 아름다운 모습의 연속이다. 그런데 권력의 정점에 가까워지는 1778년 이후에는 자신의 초상화를 한 사람에게만 계속 의뢰했다. 오늘날 제일 잘 알려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미지는 모두 바로 그 원픽의 화가,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신분의 차이는 있었지만 동갑이었던 둘은 정서적 교감을 나눈 듯하다. 특히 아직 여성 직업 화가가 거의 없던 시기에 화가의 딸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경력을 쌓아온 비제 르브룅에게는 큰 영광이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도 친구 같은 이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작업을 맡기는 데 안도한 듯하다.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30여 점의 초상화 숫자만으로도 왕비가 그를 총애했음은 확실하다. 비제 르브룅 또한 단순히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수준의 초상화 제작이 아니라 언제나 예술적으로 혁신적이며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의 자녀들'은 왕비의 삶을 바라보는 화가의 연민이 드러나는 역작이다. 무덤덤한 얼굴로 화면 밖을 바라보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둘째 왕자를 품에 안고 있고, 공주는 엄마에게 기대며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으며, 첫째 왕자는 반대편에 서서 빈 요람의 덮개를 들어 올리고 있다. 요람의 주인공은 지금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아니라 이 그림의 제작 기간에 죽어버린 막내딸 소피 엘렌이었다.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 아기를 잃은 왕비는 슬픔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자신의 비극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캔버스 앞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토록 사연 많은 이 작품은 사실 매우 정치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 대혁명이 일어나기 약 2년 전, 이미 대중에게는 사치스럽고 문란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왕비의 오명을 씻기 위해 비제 르브룅은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왕비의 이미지 만들기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가로세로 모두 2m가 넘는 이 거대한 그림은 포근한 실내에 존엄한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로 인물들을 안정감 있게 배치시키고 있다. 가족의 오른편에 굳이 값비싼 보석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던 장식장이 있는 것 또한 의미 있다. 로마사에서 고귀한 성품을 지닌 어머니로서 훌륭한 정치가들을 키워낸 코르넬리아가 어느 날 떠돌이 보석상인이 집을 방문했을 때,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자신은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거절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그림에서 취한 태도 또한 금은보화보다 아이들을 더 아끼는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림 속에서는 주로 반짝이는 실크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던 왕비가 이 작품에선 붉은 벨벳 옷을 입고 있는데, 이 또한 루이 15세의 배우자이자 조용하고 소박한 행실로 많은 존경을 받았던 마리아 레슈친스카, 즉 그의 시어머니 이미지를 빌려온 것이다.
민심을 바꾸려는 이런 노력은 모두가 알다시피 수포로 돌아갔지만, 남자가 주도하던 당시 미술계에서 여성 화가가 이런 걸작을 만든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단두대에서 처형된 왕비와 그렇게 친했으나 비제 르브룅은 수도 경비를 서던 보초의 도움으로 무사히 프랑스를 빠져나올 수 있었고, 이미 유명한 그의 그림 실력 덕분에 유럽 각지에서 초상화 작업을 하며 86세 나이까지 살 수 있었다. 각별했던 두 여인의 상반된 운명이 흥미롭고, 역시 옛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는 대목이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그래도 사람이 가꾸고 연마하여 내면에 남는 실력만은 거센 격랑도 이겨낼 힘이 된다는 걸 기억해야겠다.
[이지현 OCI미술관장(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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