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 쬐까 달렸다던디, 민물새우탕으로 속 풀어볼까요잉”
수원 한정식 식당 궁전
관광객을 상대하는 북적이는 ‘TV 맛집’은 사절합니다. 지역의 특색있는 숨은 맛집, 누가 가장 잘 알까요? 한겨레 전국부 기자들이 미식가로 이름난 지역 공무원들에게 물었습니다.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한두 군데 마지못해 추천하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이네요.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코끝 찡한 추위가 몰려온 날이었다. 새해를 맞은 핑계로 전날 너무 무리한 탓일까. 속이 아픈 듯 메슥거렸다. ‘아침보고’ 시간은 슬금슬금 다가왔지만, 머리는 띵하고 아랫배는 연실 꾸륵꾸륵 소리를 냈다. 일간신문 기자의 일과 중 가장 피하고 싶은 시간은 아침보고다. ‘오늘은 뭘 취재해서 언제까지 원고지 몇장 분량을 써 보내겠다’는 업무보고인데, 기자들한테는 출근 도장을 찍는 일과 비슷하다. 헝클어진 머리칼처럼 머릿속도 뒤엉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결국 고참 기자의 ‘비책’을 꺼내 들었다. “오전 보고거리 아직 못 찾았습니다. 오후에 다시 하겠습니다.” ‘기삿거리 아직 없으니 배 째시오’나 다름없는 뻔뻔한 보고다. 후배 부장과 팀장한테는 다소 민망했지만, 어쨌든 면피를 하고 나니 한숨 돌린 듯했다. 그러나 속은 여전히 뱃멀미 중이었다.
해장에 무슨 한정식이여?…한정식 맞네!
먹이를 찾아 들판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숙취 사냥’에 나설 즈음이다. ‘드르륵드르륵’ 하고 휴대전화가 떨렸다. 경기도청 오아무개 팀장이었다. 전남 보성이 고향인 그는 두 살 아래지만 20년 지기다. “성님, 들어본께 어제 쬐까 달렸다던디. 애먼 속 그만 괴롭히고 깔끔하게 풀고 옵시다.” 제법 입맛 까다롭고 ‘맛집 백과’로 통하는 공무원의 말인지라, 고향 충청 사투리로 “그랴~ 그럼”이라고 능청맞게 대꾸했다.
시간 맞춰 차에 올랐는데 내비게이션에 찍힌 행선지가 ‘한정식집’이다. “아니 해장에 무슨 한정식이여?”라고 투덜대자, “아따~ 일단은 가만히 계셔 보시오잉”이란 핀잔이 돌아온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 행궁이 보일락말락 할 때 승용차가 화성 뒷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성곽 뒷마을인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이다. 주차하자마자 찬바람 쌩한 골목길로 들어가 걸음을 재촉했다. 어른 서너명이 지나면 꽉 차는 비좁은 골목이다. 이곳엔 사주·관상을 봐준다는 점집들이 두서너 집 건너 하나씩 있다.
1980년대 영화세트장 같은 배경으로 빨려들듯 들어가자 오래된 한옥 한 채가 나타났다. ‘궁전’이란 옥호를 가진 집이었다. 그런데 임금이 거처하는 궁전(宮殿)이 아니었다. ‘물고기이름 전(䱼)’을 쓴 궁전이었다.
나무 대문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란 문구가 적힌 한지가 붙어 있었다. 불편한 내 속도 건양다경 하길 바란 마음으로 대문을 넘어섰다. ㅁ자 형태의 마당에 들어서자 오 팀장이 “장모님~ 저 왔습니다”라고 외쳤고,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앞 마루에 걸린 미닫이문이 열렸다. 60대 중반의 주인 양반이 맞으러 나왔다. 오 팀장은 “여긴 장모님이 해주시는 집밥 생각날 때 오는 곳이라 무조건 장모님이라고 부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집 밥은 광천수로만 짓습니다”
곧바로 대문 옆 ‘문간방’이라고 적힌 마루로 안내 받았다. 창호지에 단풍잎을 넣어 바른 문을 밀고 들어서자 대학 시절 자취방이 생각났다. 황토로 덧댄 벽, 원목으로 만든 옛날 가구, 숫자가 큼지막한 달력, 소박한 액자 등등이 그랬다. 그리고 벌써 점심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펄펄 끓는 민물새우탕이었다. 새우와 무, 미나리, 호박이 어우러진 국물은 탁하지도 맑지도 않아 보였다. 숟가락을 들자마자 떠넣은 국물맛은 얼큰하고 달큰했다.
이곳에서 25년 동안 ‘공무원 밥상’을 차렸다는 주인 홍춘선씨는 “뜨거우니 천천히 맛있게 드시라”고 말한 뒤 바람처럼 사라졌다. 채 5분이 안 돼 돌아온 그의 손에는 돌솥밥을 올린 쟁반이 들려 있었다. 솥밥 뚜껑을 열자 허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는데, 고슬고슬한 밥에 윤기가 가득했다. 홍춘선씨가 말했다. “우리집 밥은 광천수로만 짓습니다. 드셔 보세요. 먹을 만할 겁니다.”
콩나물, 잡채, 깻잎 장아찌, 멸치 볶음에 꼴뚜기젓, 시금치 등 10여 가지 밑반찬과 어우러진 한 상이었다. 가자미 튀김도 먹음직스럽게 올라왔다. 들기름을 발라 정성껏 구운 김과 장독에서 막 꺼낸 듯한 김치는 시원한 맛을 냈다. 덩달아 따라 나온 ‘밥도둑’ 간장 게장이 입맛을 돋웠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란 말이 딱 어울릴 법한 식사가 시작됐고, 잠시 뒤 매콤한 제육볶음도 들어와 밥상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얼큰하고 시원한 민물새우탕에 쌀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돌솥에 뜨거운 물을 부어 누룽지까지 들이켜고 나니, 그제야 방에 걸린 차림표가 눈에 들어온다. 솔직히 눈길 끌 만한 메뉴는 찾아볼 수 없는 그저 흔한 한정식이었다. 굳이 찾자면 삼합, 홍어회, 아귀찜 정도였다. 나머지는 집에서 만들어 먹는 반찬들이었지만, 하나하나가 주메뉴나 다름 없었다.
400㎡ 터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한옥은 1936년에 지어졌다고 했다. 마당을 둘러싸고 자리잡은 방들은 저마다 이름이 있는데, 안방, 사랑방, 문간방에 별채까지 모두 8개나 된다.
부엌으로 통하는 문에는 ‘수원화성 전도’가 내걸려 있고, 벽에는 역대 경기지사를 지낸 인물들의 사인 적힌 ‘맛 칭찬’이 붙어있었다. 유명 연예인과 가수, 소설가의 것들도 많았다.
음식맛의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뭐 특이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집에서 먹는 것과 똑같이 만들어 나누는 것뿐인데, 오시는 분마다 다이어트를 포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함께 간 오 팀장은 “엄마 손으로 조물조물 요리한 손맛으로 많은 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며 “맛과 정과 옛 추억의 멋을 맘껏 즐기고 가는 집밥”이라고도 말했다. 맛집이란 게 사람 입맛 따라 모두 다르지만, 집밥의 정겨움은 매한가지일 것이라는 말로 들렸다.
인심 좋은 이 식당에서는 꼭 차림표 음식만 고집하지 않는다. 단골손님들이 삼겹살이 먹고 싶다고 청하면, 인근 시장 정육점에서 두툼한 고기를 사다 구워주기도 한다. 매콤한 비빔국수가 생각나도 ‘장모님’에게 부탁하면 흔쾌히 ‘오케이’ 한다.
골목 사이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걸어 나오는 길은 추억이 가득한 외갓집을 나서는 기분이었다. “가끔 들르세요”라는 주인장 말에 “집 잘 지키고 계세요. 이사하시면 안 돼요”라고 답한 뒤 ‘얼른 기자실로 들어가 아침에 걸렀던 오전보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수원 화성 한정식 궁전/15매 안팎+사진’이라고.
글·사진 김기성 기자 player0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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