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먹겠다는 의지…‘잔꾀’가 만들어낸, 주당을 위한 술 [기술자]
지난주 <기술자> 코너가 연재된 뒤 가까운 주정뱅이, 아니 애주가 몇 분이 제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와인은 소주처럼 ‘취하는 맛’이 없어 재미가 없고, 그렇다고 또 많이 마시면 다음 날 숙취가 심하다는 토로였습니다.
와인 중에서도 좀 더 ‘술 같은 술’을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오늘 <기술자>에서는 이런 분들을 위해 ‘주당맞춤와인’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그 탄생부터 어떻게든 술을 먹겠다는 의지에서 비롯한 술입니다. (매경닷컴은 건강하고 책임감 있는 음주 문화를 지향합니다.)
역사 속 기발한 발명품들이 대체로 큰 전쟁 전후에 만들어졌듯이 주정강화와인 또한 그랬습니다. 백년전쟁(1337~1453년)에서 프랑스에 패한 영국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양국 관계가 너무 나빠져 보르도 와인을 들여오지 못하게 된 것이었죠.
식당 소줏값이 아무리 올라도 기어이 술집으로 향하는 오늘날 우리처럼 영국인들도 술을 덜 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보르도 지역 대신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와인을 들여오기로 결심합니다.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에서 와인을 수입하면 프랑스에서 들여올 때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린다는 점이었습니다. 육로는 물론이며 항해도 더 오래 해야 했던 데다 스페인·포르투갈의 날씨가 프랑스보다 덥기까지 했습니다.
냉장고가 있던 시절도 아니니 와인이 멀쩡할 리 없었습니다. 영국에 도착한 오크통을 열어보면 식초처럼 변질해 시큼한 냄새가 나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더러는 곰팡이까지 피어있다고 하니 그 아까운 걸 본 술꾼들 속이 오죽했을까요.
브랜디를 섞은 와인은 포르투갈 도오루(Douro) 강 하구에 있는 포르투(Porto) 지역에서 선적됐다고 합니다. 자연스레 지역명을 따 ‘포르투 와인’이라고 불리다가 다시 이를 영어로 표현한 ‘포트 와인’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합니다.
포트 와인을 통해 그 유래를 말씀드렸는데 포트 와인이 전부는 아닙니다. 포트 외에도 마데이라(포르투갈), 셰리(스페인), 베르무트(프랑스와 이탈리아), 마르살라(이탈리아), 피노 데 샤랑트(프랑스) 등이 모두 주정강화와인에 해당합니다.
이 중 포트와 마데이라, 셰리를 두고 흔히 ‘3대 주정강화와인’이라고 합니다. 국내에서 대형마트나 주류 전문점을 가보시면 주정강화와인 코너에 대부분 이 세 종류 제품만이 있습니다. 오늘 <기술자>에서도 이 3종을 중심으로 특징과 제조법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포트 와인 역시 여느 와인을 빚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도를 으깨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농익고 건포도처럼 된 과육을 으깬 뒤 효모를 넣고 발효하다가 적당한 당도에 이르면 주정, 즉 브랜디를 첨가해 효모를 죽입니다. 발효를 중단시키기 위함인데요.
이 브랜디가 언제 첨가됐는지, 또 으깨기 전 포도가 얼마나 푹 익은 상태였는지가 와인의 당도를 결정합니다. 제품마다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브랜디와 와인의 비율은 1대4 정도라고 합니다.
알코올 도수가 올라간 와인은 커다란 오크통(대체로 몇십년 된 오크통)에 옮겨 담아 숙성합니다. 5~10년 숙성이 통상적인데 길게는 몇십년 숙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와인이 적절히 숙성됐다고 판단될 때 블렌딩을 거친 뒤 제품화합니다.
숙성 기간이 짧다고 품질이 떨어지는 건 결코 아닙니다. 3년 정도만 숙성되더라도 상큼하고 깔끔하면서 과육 본연의 싱그러운 맛이 강하게 납니다. 화이트 포트라면 샴페인처럼 은은한 금색을 띠고, 레드 품종이라면 루비 같은 색상을 자랑합니다.
숙성 중 산화가 일어나 진한 적갈색을 띠는 와인은 ‘토니(Tawny Port)’, 또는 ‘타우니 포트’라고 합니다. 토니 포트는 산화 기간이 짧게는 10년부터 길게는 40년 이상에도 이르는데 숙성 기간만큼 진하고 농밀한 맛이 특징입니다.
단맛이 강하면서도 무게감이 있고, 알코올 도수가 높으면서도 그 향은 튀지 않는 게 매력입니다. 토니 포트보다 더 오래 발효해 당도를 낮추고 알코올 도수를 올린 제품은 ‘빈티지 포트’라고 부릅니다. 오래될수록 말린 자두, 견과류, 초콜릿, 커피의 풍미가 느껴집니다.
오래 숙성한 빈티지 포트는 개봉하고 일주일 정도는 변질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여느 와인과 마찬가지로 빈티지 포트에는 일반 코르크가 사용되는데 그 외 대중적인 제품에는 플라스틱 꼭지가 붙은 짧은 코르크 마개가 쓰여 오프너가 필요 없습니다.
마데이라 섬은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속 잭 스패로우 선장이 현역(?)이던 대항해시대, 대서양 항로의 중요한 보급지였습니다. 유럽에서 만들어진 와인을 동북아시아로 수출하려면 아프리카를 거쳐야 했는데 당연히 산소와 열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겠죠.
이를 극복하고자 포트 와인과 마찬가지로 브랜디를 첨가해 만들기 시작한 게 마데이라 와인의 시초가 됐습니다. 참, 주정강화와인을 만들 때 쓰는 브랜디는 사과 등 다른 과일이 아닌, 포도로 만든 것만 사용합니다.
포트 와인과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고온 숙성 과정을 거친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와인을 오크통에 담은 뒤 30~35도 남짓의 따뜻한 옥탑방에 두었다가 차츰 아래층으로 이동시켜 온도를 낮춰가며 숙성했습니다. 이 방법을 두고 ‘칸테이로스’ 또는 ‘칸테이루’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나라 안동소주가 꼭 그렇듯 마데이라도 고가 제품에는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제품들은 스테인리스 통에 담아 45도 남짓 온도에서 숙성한 뒤 다시 오크통으로 옮겨 담아 숙성합니다. 숙성 기간은 최소 3년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마데이라 와인은 식전주, 또는 디저트용으로 많이 쓰입니다. 포트 와인과 달리 주로 화이트 품종으로 만드는데 숙성 과정에서 농익은 맛과 호박색이 일품입니다. 발베니를 비롯한 일부 브랜드는 이 마데이라를 보관했던 통에 위스키를 숙성하기도 합니다.
산화와 열화 과정을 같이 거쳤기에 포트 와인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풍미를 냅니다. 서구권에서는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 등을 요리할 때 이 마데이라 와인으로 만든 소스를 활용해 고기의 잡내를 잡기도 합니다.
셰리 와인은 팔로미노(Palomino)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에 브랜디를 첨가해 만듭니다. 포트 와인과 차이가 있다면 숙성이 다 끝난 뒤에 주정강화 과정을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포트 와인보다는 대체로 단맛이 적은 편입니다.
셰리 제조는 팔로미노로 새 술을 만든 뒤 커다란 오크통에 담아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때 이 오크통에 공기가 잘 통하도록 일부러 술을 가득 채우지 않는데요. 담아내고 3개월 정도 시간이 지나면 ‘플로르(Flor)’라고 하는 얇은 효모 층이 형성됩니다.
플로가 핀 술은 ‘피노(Fino) 셰리’라고 표현합니다. 브랜디를 조금 첨가해 제품화하면 짠맛, 감칠맛, 사과, 견과류 등의 풍미를 내는데 해산물 조림이나 스튜, 안초비 등과 잘 어울립니다. 전반적으로는 달지 않고 가벼운 맛을 냅니다.
향만 믿고 처음 드셔보시는 분은 그 맛에 조금 당황하실 수도 있는데요. 평소 소맥만 즐기는 한 친구가 이 올로로소를 마신 뒤 “박카스 같다”고 한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역시 고기도 술도, 먹어본 사람이 더 잘 먹는 것 같습니다.
셰리 중 최고봉으로 꼽히는 건 ‘페드로 히메네스(Pedro Ximenez)’입니다. 이름 그대로 페드로 히메네스라 불리는 품종의 포도를 건포도처럼 될 때까지 놔두었다가 수확해 만들어 냅니다. 색이 짙고 끈적하며 농익은, 잼처럼 진하고 단맛이 아주 일품입니다.
요즘 입소문을 잘 타 인기를 끌고 있는 위스키 맥켈란의 경우 이런 셰리의 특징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셰리를 담아냈던 오크통에 새로 만든 위스키 원액을 담아 수년간 숙성하면 녹진하면서도 달달한 셰리 특유의 향이 묻어납니다.
오늘 소개한 주정강화와인의 중심에는 모두 ‘브랜디’가 있었는데요. 다음주 <기술자> 코너에서는 이 브랜디와 샴페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참고문헌 및 자료>
ㅇ술 잡학사전, 클레어 버더(Clare Burder), 문예출판사, 2018
ㅇ그랑 라루스 와인백과, 라루스 편집부, 시트롱마카롱, 2021
ㅇTaylor’s Port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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