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로만 알려진 허준 … 우리가 몰랐던 얼굴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4. 2. 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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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허준'과 픽션 '소설 동의보감' 등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조선 명의 허준(1539~1615)의 삶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허준 연구로 20년 전 박사 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김호 교수(서울대 아시아연구소)가 '양천허씨세보' '장성읍지', 유희춘의 '미암일기', 성혼의 '유계집' 등까지 연구해 행간을 바탕으로 허준의 생애를 평전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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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 넘어 역병 의서에 혼신
"역병은 나쁜 정치서도 온다"
동식물 지식 정리 자연학자
사전 예방 중시한 실용학자
허준 생애 입체적으로 고찰
허준 평전 김호 지음, 민음사 펴냄, 2만원

드라마 '허준'과 픽션 '소설 동의보감' 등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조선 명의 허준(1539~1615)의 삶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 허준 연구로 20년 전 박사 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김호 교수(서울대 아시아연구소)가 '양천허씨세보' '장성읍지', 유희춘의 '미암일기', 성혼의 '유계집' 등까지 연구해 행간을 바탕으로 허준의 생애를 평전에 담아냈다. 그가 정의 내린 허준은 '네 얼굴의 유의(儒醫)'다.

허준은 양친 집안이 모두 무관 출신인 양반 가문의 후손이지만 서자였고, 문·무과 합격자가 아니라 천거로 내의원에 입성한 의원이었다. 대표적 호남 사림 중 한 사람인 미암 유희춘은 사서삼경과 의서에 밝고 이미 의술로 이름난 허준을 천거해 내의원에 들어갔다. 그가 한 사람의 몸을 치료하듯 한 나라의 병을 치료하는 의국 정신으로 충만한 데는 평생 내의원 어의로 활동한 이유도 있었다.

악명 높은 선조 시대에 살았지만 선조는 백성의 건강에 무심하지는 않았다. 각 도의 한두 군데를 정해 의국을 설치한 후 지방 약재를 중앙에 납입하도록 하고 이를 다시 지방에 재분배하기도 했다. 많은 이에게 의료 혜택을 주기 위함이었다. 의학 지식 보급이 절실하던 때라 정부 주도로 의서 편찬이 활발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중에 두창 치료에 관한 의서 편찬을 허준에게 명령하기도 했다.

1610년 칠순의 나이에 '동의보감'을 편찬한 노숙한 어의는 쉬지 않고 역병 의서를 집필했다.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이다. 그는 역병의 원인을 단지 무너진 자연의 질서에서 찾지 않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 질서에서 찾았다. 좋은 정치로 백성의 삶이 풍족하면 역병이 일어나도 견딜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조선의 역병 유행은 수재, 한재, 기근과 동반하는 일이 많았는데 먹을 것이 부족해 더욱 취약해졌다. 구황 작물이 백 개의 약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역병 학자는 허준의 네 얼굴 중 하나다.

허준의 가장 큰 업적은 알다시피 '동의보감' 편찬이다. 실증에 근거해 우리 산천의 동식물 지식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자연학자였다. 그는 조선의 자연을 활용해 사람을 이어가는 방법을 연구했다. 속방(俗方)이라는 이름으로 의서에 남긴 기록은 놀랍다. 조선 사람의 오랜 경험과 전통, 내의원의 비법부터 왕실에서 즐긴 특별한 음식과 술, 민간의 구급 기술과 기근을 이겨내는 구황의 지혜가 모두 여기에 적혔다. 그래서 저자는 '동의보감'의 속방은 조선 의약학 정보와 지식의 보물 창고 같다고 찬사를 보낸다. 허준의 또 다른 얼굴은 자연학자와 의학자였으며, 사후의 약방보다 사전의 양생을 중시한 실용학자의 면모가 있었다고 저자는 논증한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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