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안전모 하나 갖다 놔, 피 좀 묻혀서”···아파트 중대재해 ‘그날’

김송이 기자 2024. 2. 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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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모. 경향신문 자료사진

“(직원 A씨가) 안전모를 안 쓰고 올라간 것 같으니 사고 현장에 안전모를 하나 갖다 놔라.”

2022년 7월4일 경기 양주시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장 B씨는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장 C씨로부터 이 같은 지시를 받았다. 관리사무소 직원 A씨가 오수관 점검을 위해 2.5m 높이에서 작업하던 중 사다리가 파손돼 바닥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전달된 지시였다. 바닥으로 추락한 A씨는 병원에 이송된 지 30시간 만에 숨졌다.

의정부지검 형사4부(부장검사 이상훈)는 지난해 12월 이 아파트 관리소장 B씨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및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범행 현장 조작에 관여한 C씨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교사 혐의로, 관리업체 대표이사 D씨는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각각 불구속기소됐다.

2일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검찰로부터 제출받은 공소장을 보면, 이들이 해당 사고 이후 노동청 현장조사나 형사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사고 현장을 훼손하고 원인조사를 방해하기 급급한 모습이 담겨 있다. 공소장에 따르면 관리소장 B씨는 A씨가 추락 위험이 있는 곳에서 작업하는데도 사전에 안전모와 안전대를 착용하게 하거나 안전대 걸이를 설치하지 않았다. B씨는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보건관리책임자로서 A씨 등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안전을 관리하고 감독할 의무가 있는데 이를 다하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사고 직후 입주자대표회장 C씨는 관리사무실로 찾아가 B씨에게 “안전모를 가져다 두라”고 지시한 것으로 파악됐다. B씨는 자재 창고에서 흰색 안전모 2개를 꺼내들고 사고 현장으로 가 1개는 바닥에 흘러 있던 A씨의 혈흔을 묻혀 추락 사고 장소에 두는 등 사고 현장을 훼손한 혐의를 받는다. 나머지 안전모 1개는 현장에 설치된 소화전 위에 올려뒀다.

이로 인해 사고 당시 A씨가 안전모를 쓰고 있지 않았던 점과 입주자대표회장의 은폐 지시는 사건 수사 초기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사고 당시 A씨가 하던 배관 점검 작업은 사건 발생 12일 전까지만 해도 그의 업무가 아니었다. 이전까지 이 아파트는 배관 분리·점검 작업을 외부 전문업체에 맡겨왔는데, 입주자대표회는 관리비를 줄이고자 관리사무소 직원들에게 해당 업무를 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결정한 내용은 같은 해 6월24일 아파트 관리인들에게 통보됐다.

B씨와 C씨가 이전에도 아파트에서 발생한 산재 사건을 은폐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2020년 10월 A씨는 아파트 계단에서 센서등 교체작업을 하던 중 3m 높이의 이동식 사다리에서 추락해 허리를 다쳤다. A씨는 6일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두 사람은 A씨가 정상적으로 출근한 것처럼 출근 기록을 조작했다. 산업재해보상보험으로 처리할 경우 고용노동청의 특별감독이나 인사고과 불이익이 있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A씨의 입원치료비 719만원 중 515만원은 A씨의 개인 비용으로, 나머지는 건강보험으로 처리하도록 했다. 산재 조사표를 노동청에 제출하기는커녕 재해 자체를 은폐한 것이다.

검찰은 지난해 12월15일 두 사람을 기소했다. 지난달 3일에는 B씨가 속해있는 아파트 관리 법인 대표 D씨를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산업재해치사)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D씨는 각 사업장의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구축할 의무를 다하지 않아 소속 직원인 B씨가 안전 조치 의무를 저버리도록 방치한 혐의를 받는다. 해당 법인은 상시근로자 2400여명 규모로 기소 당시에도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이었다.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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