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워크’ 보다 터널워크…상남자들의 어둠 속 패션쇼 [올어바웃스포츠]
2022년도 우승자는 미프로농구(NBA) 오클라호마시티 선더의 샤이 길저스알렉산더였습니다. 그는 에이셉 라키, 켄드릭 라마 등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래퍼들을 제치고 ‘1년간 가장 옷 잘 입는 남자’란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날렵한 몸매와 스타일리시한 옷 맵시, 그에 상응하는 농구실력까지 갖춘 길저스알렉산더가 코트 위에서 보여주는 ‘멋’은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유니폼과 운동화로 익숙한 농구선수가 가장 스타일리시한 ‘운동선수’가 아닌 ‘남자’로 꼽히게 된데는 따로 이유가 있습니다.
NBA의 ‘터널 워크’가 바로 비밀의 열쇠입니다. ‘터널 워크’는 이제 패션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이벤트중 하나로 꼽힙니다. 선수들은 매 경기 전 런웨이에서 캣워크를 시전하고, 패션 브랜드들과 협업으로 마련한 아이템들을 몸에 두른 채 카메라 세례를 받습니다. 땀내나는 농구선수를 패션 아이콘으로 끌어올리는 중심이 된 ‘콘크리트 런웨이’. 무엇인지 알아봤습니다.
약 30초간의 런웨이의 홍보 효과는 만만치 않습니다. 워싱턴 위저즈의 포워드 카일 쿠즈마는 지난해 2월 미국 브랜드 ‘릭오웬스’의 과감한 검정색 패딩을 입고 경기장에 입장합니다. 패션에 큰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기괴하게 보일 수 있는 이 ‘푸퍼 자켓’은 2000달러가 넘는 고가지만 쿠즈마의 캣워크 이후 며칠만에 전량 매진됩니다. 현재 밀워키 벅스에서 뛰고 있는 카메론 페인이 입은 1050달러짜리 보테가 베네타 버튼다운은 경기장 터널에서 비춰지고 난 뒤 미국 전자상거래 사이트에서 4번이나 재입고될 정도로 인기를 끕니다. 쿠즈마는 “패션 브랜드들은 터널과 선수들이 하는 모든 일이 사회와 대중 문화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실제로 보고 있습니다”고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선수들도 어떤 옷을 입고 경기장에 나설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역대 최고의 3점 슈터 스테판 커리는 2013년 첫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를 때 이 ‘콘크리트 런웨이’를 처음 경험합니다. 전국에 중계되는 플레이오프 경기인만큼 경기장 입구부터 많은 카메라들이 커리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죠. 그때부터 그는 옷차림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커리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선수들은 며칠동안이나 어떤 옷을 입을지 스트레스를 받는데, 결국 옷을 입는 시간은 주차장에서 라커룸까지 30초 남짓”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저는 차에서 나올때 핏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버튼이 잠겨있지 않거나 셔츠에 주름이 접혔는지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2005년 데이비드 스턴 당시 NBA 총재의 ‘비즈니스 캐주얼’ 복장 규정이 결정적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NBA는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은퇴 후 시청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농구는 흑인들의 열렬할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점점 라이트팬층을 잃고 있었지요. 특히 당시 리그 문화와 트렌드를 이끄는 앨런 아이버슨은 NBA의 얼굴이 되기엔 다소 ‘매니악’했습니다. 힙합문화의 상징인 오버핏 티셔츠와 청바지에 삐딱한 모자, 레게 머리 등은 NBA의 확장성을 제약하는 요소가 됐지요.
이가운데 2004년 11월 ‘궁전의 악의(Malice at the Palace)’란 대형 사건이 터집니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인디애나 페이서스 선수들이 경기도중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패싸움을 시작했고, 일부 팬들은 선수들에게 인종차별적 비난을 쏟아내자 페이서스의 론 아테스트가 관중석에 난입해 주먹질을 했습니다. 10분간의 난투는 텔레비전을 통해 미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경기 후 일부 선수들이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선수들은 반발했습니다. 아이버슨과 같은 당시의 패션 아이콘들은 물론 팀 던컨과 같은 ‘패션 테러리스트’들도 반대 목소리를 더했죠. 아이버슨은 “그들(NBA 사무국)은 우리 세대, 즉 힙합 세대를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선수는 복장 규정이 ‘흑인을 표적으로 삼았다’며 인종차별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선수들의 반발은 시간이 갈수록 사그라 들었습니다. 그리고 선구적인 선수 몇몇이 이를 기회로 삼습니다. 지금까지도 NBA의 얼굴인 르브론 제임스와 그의 영혼의 파트너 드웨인 웨이드(은퇴)가 대표적입니다. 르브론 제임스의 스타일리스트는 복장 규정이 생긴 후 하이패션 브랜드와 접촉을 시도합니다. 브랜드들에게 선수들의 사이즈에 맞는 맞춤 의류를 제작하도록 설득했고 NBA와 패션업계의 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었지요. 웨이드는 2014년 인터뷰에서 “처음 선수들 사이에선 ‘알겠어, 이제 트레이닝복만 입을 순 없고 차려 입어야 한다 이거지?’로 시작했다”며 “이후에는 남자들 사이에서 (패션이) 경쟁이 돼 자신이 입은 옷에 대해 점점 더 이해하고 알아가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NBA와 패션 사이의 화학적 융합을 지켜보단 사무국도 곧바로 호응합니다. 2014년 새로 취임한 아담 실버 사무국장은 복장 규정을 관대하게 바꿨고, 본격적인 하이패션 브랜드의 과감한 시도가 경기장 터널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2018년 NBA 파이널 1차전의 ‘터널 워크’는 경기 결과보다 더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여기서도 주인공은 르브론입니다. 그는 남성패션 브랜드 톰브라운의 정장을 선수단 전원이 입도록 설득합니다. 르브론 본인은 톰브라운의 상징적인 셔츠와 넥타이, 양말과 반바지 정장을 입었고, 4만1000달러짜리 악어가죽 가방을 들고 등장합니다. 미국 스포츠전문매체 크로니클의 한 기자는 “자신의 프로 스포츠 취재 경력중 선수의 의상이 그렇게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선수들은 개인 스타일리스트를 채용하기도 합니다. ‘플러그’를 통해 옷을 구매하기 보다는 TPO(Time·Place·Occasion)에 맞는 적절한 스타일링을 하도록 ‘외주’를 맡기는 것이죠. 과거엔 유명 선수들만 스타일리스트를 뒀지만, 요즘엔 젊은 선수들이 패션 브랜드의 눈에 들도록 리그에 입성하자마자 패션 컨설턴트들을 고용하는 모양새입니다. ‘터널워크’ 전문SNS인 리그핏은 “5~6년 전에는 드웨인 웨이드 등을 제외하고 농구 선수들은 패션 위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모두가 파리, 밀라노에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일부 선수들은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기도 합니다. 리그 MVP 출신이자 과감한 의상 스타일로 유명한 러셀 웨스트브룩은 의류 브랜드 ‘아너 더 기프트(Honor the Gift)’를 런칭했습니다. 전 NBA 선수 닉 영은 2017년 NBA 선수로서 처음으로 ‘모스트헤이티드(Mosthated)’란 패션 브랜드를 만들어낸 바 있습니다. 원조 멋쟁이 드웨인 웨이드가 만든 양말 브랜드는 NBA의 공식 양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는 바뀌고 있습니다. 같은 설문에서 16~25세 응답자중 NBA의 팬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40%로 NFL(33%)을 제치고 1위에 올랐습니다. 이같은 변화는 젊은 세대들과 호흡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NBA의 자세에서 비롯됐습니다.
‘터널 워크’는 이같은 변화의 한복판입니다. GQ는 “터널 워크는 스포츠와 패션, 힙한 문화가 융합돼 우리가 스타일을 어떻게 인식하고 참여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포츠와 패션의 융합. 어디까지 가는지 살펴보는 것도 볼거리중 하나이지 않나 싶습니다.
≪[올어바웃스포츠]는 경기 분석을 제외한 스포츠의 모든 것을 다룹니다. 스포츠가 건강증진을 위한 도구에서 누구나 즐기는 유흥으로 탈바꿈하게 된 역사와 경기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문화, 수백억원의 몸값과 수천억원의 광고비가 만들어내는 산업에 자리잡은 흥미로운 내러티브를 알게 된다면, 당신이 보는 그 경기의 해상도가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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