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22. 참으로 힘겨운 군역- 수군(水軍)

최동열 2024. 2. 2.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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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삼척항 전경(사진 뒤편으로 조선시대 수군 진영인 삼척포진영이 존재했다·삼척시립박물관 소장 사진)

조선시대 수군(水軍)처럼 힘들었던 군인이 또 있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병역 의무는 힘겨운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시대 수군의 군역은 그 어떤 의무보다 고충이 컸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조선은 왜구들의 준동으로 해안은 물론 내륙 백성들까지 삶이 피폐해지는 등 피해가 그치지 않자, 초기부터 무술에 능한 자를 수군에서 우대하는 등 수군 무력을 증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스스로 수군이 되고자 하는 자는 거의 전무했다.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다반사인 데다 뱃멀미에 시달려야 하고, 고된 노동이 많은 수군의 역(役)이 여러 병종(兵種) 가운데 가장 힘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수군은 해상 순찰과 전투 외에도 병선의 건조와 수리를 직접 감당해야 했고, 또 왜구와 같은 적이 육지에 상륙했을 때는 지상 전투도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조선수군사’를 펴낸 북한학자 오붕근 박사는 ‘수군은 소금을 만들고, 물고기를 잡고, 미역을 따는 등의 잡일까지 해야 했다’며 ‘수군은 그 어느 직종을 막론하고, 육군의 여러 병종에 비해 2배 이상의 무거운 부담을 지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요즘으로 치면 해군, 해병대의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면서 조선 기술자, 어민, 노역 근로자 역할까지 수군들이 모두 감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고단하다 보니 당연히 수군은 천시되고, 수군의 군역만큼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던 것이 당시 백성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 가정 형편이 넉넉한 선군(船軍)이 본인이 번을 서지 않고 빈궁하고 빌어 먹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대신 번을 세우니 선군이 유명무실해졌다는 내용을 담은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세종21년 7월 병인조/국사편찬위원회)

실록에는 수군이 얼마나 힘든 존재였는지를 말해주는 기록이 적지않게 등장한다. 태종실록에는 수군의 역을 피하고자 일부러 천인 신분으로 가장한 백성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세종실록에는 집안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제가 수군의 번을 서지 않고, 빈궁하여 빌어 먹는 사람에게 대신 번을 서게 해 선군이 유명무실해 졌으니 소금구이를 업으로 하던 사람들이나 물고기를 잡는 어민들을 모집해 선군(船軍)으로 만들되, 그들에게 공로가 있다는 공패(功牌)를 주고 양인((良人)은 해령직(海領職)을 제수해 권려하자고 병조(兵曹)에서 건의한 기록도 나온다. 수군이 되려는 사람이 없으니까, 궁여지책으로 어민들을 모집한 것이다. 태종실록에는 수군 인력을 관노(官奴)들로 충당한 기록도 등장한다. 성종 대에는 결국 수군 세습 조치까지 나왔고, 임진왜란 직전에는 수군 폐지 논의까지 있었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왕자의 난으로 화를 당했을 때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정진(鄭津)이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제 복역하게 되는 곳도 전라 수군이었다.

이기훈의 ‘전쟁으로 보는 한국 역사(지성사)’ 책에는 수군의 고역을 실감케 하는 태종 원년(1401년)의 일화가 소개돼 있는데, 그 내용이 눈물겹다. 겨울철에 물속에서 작업하던 군인(수군)이 거의 죽게 되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중(스님)이 불쌍히 여겨 미음을 주었더니 그 군인이 ‘내가 이것을 먹고 다시 목숨을 이어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 하며 땅에 버리고는 물에 빠져 결국 죽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개인 무기도 자기가 알아서 마련해야 했다면 요즘 독자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조선시대 군졸들은 복무하러 갈 때 소총, 화포 등 중화기를 제외하고는 군복과 창, 활 등 개인 무기를 갖춰 입대해야 했고, 수군 또한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요즘으로 치면 입대하는 장정이 개인 화기인 소총과 군복 등을 모두 자기가 구입해서 훈련소로 들어가는 것이니까 정말 어처구니없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조선시대에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 소금구이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나 물고기를 잡는 어민들을 모집해 선군(船軍)으로 만들되, 그들에게 공로가 있다는 공패(功牌)를 주고 양인((良人)은 해령직(海領職)을 제수하자는 병조의 건의가 실린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세종21년 7월 병인조/국사편찬위원회)

오붕근 박사는 조선수군사에서 세종실록 등을 인용해 ‘수군들은 당번 근무 때 필요한 무기, 군복은 물론이고 식량까지 자체 부담해야 했고, (거주지가) 수백 리 먼 산간 고을에 있는 수군들은 교대·이동에 휴번기(휴가)를 다 소모하여 쉴 새가 없었다’고 했다.

인적 자원이 부족한 강원도 수군들은 사정이 더욱 열악했다. 지금도 강원도는 면적은 넓지만, 인구는 겨우 150여만 명에 불과한 수준이어서 젊은이가 전국에서 가장 적은 곳으로 꼽히는데, 선시대에는 더욱 인적 자원이 열악해 수군 병졸을 채우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세종 때 강원감사가 병조를 통해 임금께 올린 간언은 강원도 수군의 열악한 처지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감사는 강원도 수군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본도(本道·강원도) 영동의 각 포구 선군(船軍)은 비록 사변이 없는 때 일지라도 (오랜 기간) 장번으로 변방에 가서 있게 되니 그 폐단이 도리어 큽니다. 전쟁이 없을 때는 번을 나누어 서게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간언해 세종의 윤허를 얻는다. 당번과 비번으로 근무를 교대해 줄 대체 인력이 마땅치 않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복역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으니까, 이런 군대에 누가 가려고 했겠냐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삼척군수였던 심의승이 1916년에 엮은 삼척군지(三陟郡誌)에서는 삼척포진의 군세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수군이 많이 도망하였다’는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어선 등 배를 만드는 일도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강릉원주대 장정룡 교수는 조선 현종 때인 1660년 9월∼1662년 8월까지 2년여 동안 삼척부사를 역임한 미수 허목 선생이 재임 중 곡식을 수송할 때 구조상 어선을 사용하는 것이 위험하다면서 올린 장계와 척주지 등을 살펴보면 당시의 어선 건조 및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고 지난 2022년에 발행된 ‘한국의 해양문화(경인문화사)’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원문을 옮기면, ‘동해는 바람과 파도가 사나워 배와 노의 제도가 서해나 남해 같지 않습니다. 어부들은 7∼8월에 장마가 끝나거나 2∼3월에 눈이 녹고 따뜻해지면 모두 농한기를 이용해 여러 날을 두고 양식 준비를 해서 산중에 들어가 소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 배를 만들고, 그것을 끌어내릴 때는 소를 이용하는데, 큰 배는 소를 30마리나 동원합니다. (중략) 지금 곡식을 급히 수송해야 할 때를 당하여 곡식은 일만 섬이나 되는데, 고깃배로 백 번 수송해 봐야 겨우 몇천 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지금 영동 9개 읍에 십여 척 씩의 배를 만들게 해 100여 척을 준비토록 한다고 해도 한 읍당 소가 삼백 마리에 장정 오백 명이 소요됩니다. 이렇게 많은 인력을 투입해 배를 준비해도 장맛비를 얻지 못하면 바다까지 운반할 일이 막막합니다. 본부(本府·삼척) 이남에서는 기근으로 구황 대책이 시급한데, 많은 노력만 더 들게 한다면 원망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남쪽을 구제하기 전에 본부의 백성들이 먼저 흩어질까 걱정입니다’라는 내용이다.

▲ 인적 자원이 부족한 강원도 수군의 열악한 처지를 호소하는 강원감사의 간언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세종실록, 세종 5년 3월 임인조/국사편찬위원회)

남쪽 지방의 기근을 해소하기 위해 영동지역에서 곡식 수송용 배를 만든 다고 해도 엄청난 인력과 고충이 뒤 따르니 남쪽 지방을 구제하려다가 영동지역 백성들이 먼저 남부여대(男負女戴) 떠돌이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 나게 토로하고 있다. 수군의 군역이 고행(苦行)에 가까운 노역이었다는 것을 도처의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느니, 그 옛날 모진 고충을 감내하며 바다를 개척하고 지킨 선조들의 노고에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해양에 도전하는 자가 주도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해군력과 해양력을 키우는 것은 21세기 ‘신 해양시대’에 더욱 절실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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