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못했으니 돈 물어내”···산재 당한 청년에게 한국이 한 말
치료 대신 ‘2000만원 물어내’ 각서 내민 사장
‘이주노동자 확대’만 부르짖는 정부···이대로?
네팔 청년 A씨(23)가 한국에 온 건 지난해 여름이었습니다. 고용허가제(E-9) 비자로 입국한 A씨는 인천 남동구의 한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손이 부족하다”며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두 팔을 벌리는 한국을 A씨도 믿었습니다.
공장 일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A씨의 허리도 점점 상해갔지요. A씨는 결국 지난해 10월 크게 다쳐 병원에서 ‘제3,4,5 요추간 디스크 팽윤(초기 디스크)’ 진단을 받았습니다. 척추 중앙의 공간이 좁아져 통증을 유발하는 ‘경도척추관협착증’도 진단받았습니다.
A씨는 이주노조를 찾아 상담을 받고, 이주노조와 함께 고용센터에 ‘사업장 변경’을 신청했습니다. 사업장 변경이란 이주노동자가 임금체불·폭언·폭력 등 부당한 처우나 근로조건 위반, 산재 등을 당했을 때 일하는 곳을 옮길 수 있는 제도입니다. 고용센터의 연락을 받은 A씨 회사의 사장도 “두 달 안에 사업장 변경을 해주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두 달이 훌쩍 지난 올해 1월31일 일어났습니다. 사업장을 바꿔주겠다던 사장은 약속을 깨고 A씨에게 되레 ‘각서’를 내밀었습니다.
··· 잦은 무단결근으로 인한 당사의 피해와 외국인 도입 시 필요한 경비 및 기숙사 생활의 전반적 비용 등 지출에 따른 20,000,000원을 변제하고 이직할 것이며
만일 각서인(A씨)의 귀책사유가 발생할 시 전적으로 각서인이 책임지며, 일련의 불이익 조치에 대해 당사에게 어떠한 민형사상의 책임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을 이행 각서 합니다.
- A씨가 일하는 회사의 사장이 A씨에게 내민 각서 내용 중
A씨가 아파서 회사에 손해를 끼쳤으니 2000만원을 회사에 배상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하다 다친 것도 서러운데 산재 보상은커녕 돈을 내놓으라니요. 아프거나 치료를 위해 나오지 못한 것도 병가는커녕 ‘무단결근’이 됐습니다.
이주노조는 “이전에도 사업주 동의 없이 사업장 변경이 어려운 이주노동자의 취약한 위치를 악용해 금품을 요구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지만, 이렇게 고액의 협박성 각서를 강요하는 것은 황당하고 충격적”이라며 “사업장변경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일은 계속 발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온다, 땔감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렸듯 이주노동자들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사업장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돕는 이들은 하나같이 “사업장 변경은 하늘의 별따기”라고 입을 모읍니다. 여전히 사업주의 동의가 있어야 사업장을 옮길 수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고용노동부 등 관계부처는 ‘부당한 일을 당하면 사업주의 동의 없이도 사업장 변경이 가능하다’고 안내합니다. 이주노동 활동가들은 사업장 변경 시 사업주가 내는 서류인 ‘고용변동신고서’가 사실상 사업주 동의나 다름없다고 지적합니다.
이주노동자가 “임금체불을 당해서 사업장을 옮기고 싶다”고 해도, 사업주가 고용변동신고서에 이주노동자의 이직 사유를 ‘근무태만’ 등으로 적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이 경우 고용센터도 누구 말이 맞는지 직접 따져보기보다는, 조사하지 않거나 미뤄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이주노동 활동가들은 말합니다.
사업주들은 왜 사업장 변경을 하기 싫어할까요? 이주노조에서 일하는 정영섭 활동가의 말을 들어봤습니다.
이주노동자를 자기들(사업주)에게 묶여있는 노동력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옮긴다고 얘기하면 자기들이 피해 보는 것처럼 생각하는 행태가 비일비재해요.
- 정영섭 이주노조 활동가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생각하는 셈입니다. A씨에게 2000만원을 요구한 사장처럼 ‘사업장 변경을 하려면 돈을 달라’는 사업주들도 많습니다. 지난해 경남 밀양의 한 농장주는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과 화장실도 난방도 없는 숙소에 항의하며 사업장 변경을 요구한 여성 이주노동자들에게 “1인당 650만원을 지불하면 해주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정영섭 활동가는 “노동부에서 명확히 지침으로 이런 금품 요구를 금지하고, 이런 행태를 벌이는 사업주에게 불이익을 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사업장 변경 범위도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A씨 같은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은 취업 후 최초 3년 동안 ‘같은 업종’에서 3회만 가능했는데요. 정부는 지난해 10월부터는 ‘같은 지역 안에서’라는 기준을 추가했습니다. 노동계는 이 조치가 거주이전의 자유 등 기본권을 제한한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이를 막아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권은 점점 열악해져만 갑니다. 이주노동자 임금체불액은 매년 급증해 지난해 13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화장실도 없는 ‘비닐하우스·가건물’ 숙소 역시 여전합니다.
안전도 위태롭습니다. 2022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이주노동자 산업안전보건 현황과 정책 과제’를 보면, 이주노동자의 산재사망만인율(노동자 1만명당 산재 사망자 수)은 1.39로 전체 취업자 평균(0.77)을 웃돌았습니다. 업무상 사고 재해율도 0.87%로 전체 노동자(0.34%)보다 높았죠. 이주노동자의 산재가 잘 드러나지 않는 특성을 고려하면 현실은 이보다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인구 감소’와 ‘일자리 불균형’을 이유로 이주노동자 도입 규모를 크게 늘리고 있습니다. 사업장별 이주노동자 고용 한도를 2배 이상 확대했고, 올해 이주노동자 도입 규모도 역대 최고치인 12만명 이상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는 공식 통계로만 84만명, 미등록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120만명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노동부 소관 ‘외국인 노동자 지원센터’ 예산은 지난해 71억800만원에서 올해 0원으로 전액 삭감됐습니다.
이주노동자를 무작정 대거 도입하기보다는 그들의 심각한 인권침해 문제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사람을 땔감처럼, 땜빵처럼 쓰고 버릴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 더 알아보려면
#1
사업장 변경을 하려는 이주노동자들은 상상하지도 못한 기막힌 난관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지난해 임금체불과 열악한 기숙사 문제로 고용센터를 찾은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을 기다린 건 ‘100% 한국어’ 서류였습니다. 결국 이들을 돕던 김이찬 지구인의정류장 대표가 서류를 다시 캄보디아어로 깨알 번역해야 했습니다. 김 대표는 서류를 번역하며 무엇을 느꼈을까요?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9151528001
#2
윤석열 정부의 ‘이주노동자 대폭 확대 정책’이 가장 먼저 시행된 곳이 있습니다. 인력난에 시달려 온 조선소입니다. 정부는 국민총소득(GNI) 70~80% 수준의 높은 임금을 약속하며 고숙련 이주노동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정부는 약속을 잘 지키고 있을까요? 경향신문은 지난 7월 조선소 이주노동자들을 만나 물었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기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했는데요. 이주노동자들은 어떤 질문을 던졌을까요?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7121525001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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