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무죄 배경엔…법정서 줄줄이 바뀐 판사들의 진술
판결문에 진술번복 내역 상세 기재…임종헌은 진술 거부
(서울=연합뉴스) 이영섭 권희원 기자 = '사법농단'으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5년간의 재판 끝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배경 중에는 법정에서 잇따라 달라진 판사들의 증언도 있었다.
양 전 대법원장의 판결문에는 판사 상당수가 검찰 등에서는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듯한 진술을 했다가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서는 말을 바꾼 과정이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특히 각종 혐의에서 '최상위 실행자'로 지목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별도의 형사 재판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증언을 전면 거부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주된 혐의였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 등에 대한 법리 판단도 1심의 무죄 판결에 주된 근거가 됐지만 증인으로 법정에 나온 판사들의 잇단 '진술 후퇴' 역시 검찰의 혐의 입증에 타격을 가하며 재판부의 무죄 판단에 상당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개입 혐의에…"들은 것 같다"→"생각해보니 좀 애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이종민 임정택 민소영 부장판사)의 양 전 대법원장 및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판결문에는 판사들의 법정 증언이 무죄 판단의 주요 근거로 명시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재판개입' 관련 혐의다. 양 전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소송의 정무적 활용 방안 등을 검토하게 하고 담당 재판부에 행정처 입장을 전달했다는 것이 혐의의 골자다.
이와 관련해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법정에서 "대법원 특별조사단 조사 당시 임종헌으로부터 '양승태가 통진당 행정소송과 관련해 헌법재판소와의 문제를 적절히 다룰 수 있는 호기라고 말했다'고 들은 것 같다"면서도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좀 애매하고 사실은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을 불러 양 전 대법원장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는지 신문했지만 그는 증언을 거부했다.
결국 '양 전 대법원장이 통진당 행정소송을 정무적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는 혐의의 기초 사실부터 흔들린 셈이다.
박 전 대법관이 통진당 행정소송에서 사법부에 유리한 결론을 도출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지시한 혐의도 비슷한 이유로 무죄로 판단됐다.
사건 당시 법원행정처 내 '통진당 행정소송 대응 TFT' 구성원이었던 한 판사는 검찰 조사에서 "박병대가 '법원에 유리한 측면에서 검토해보라'는 취지의 메모를 전달한 후 TFT의 연구는 그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개발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법정에선 "박병대의 메모가 전달된 후 TFT의 연구 방향이 그의 의견과 결론을 뒷받침하는 논리 개발로 꼭 진행된 것은 아니다"라고 사실상 말을 바꿨다.
재판부는 이를 토대로 "통진당 TFT 구성원들은 박병대의 메모를 지시나 지침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반드시 메모 내용에 따라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 죄가 되지 않는다고 봤다.
"기억에 혼선" …'강제징용 재판개입' 검찰 진술 뒤집은 판사들
핵심 혐의 중 하나인 '강제징용 재판 개입'에 관해서도 판사들은 검찰에서는 양 전 대법원장 등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다가 법정에서 말을 바꿨다.
법원행정처가 소송에 외교부 의견을 반영할 수 있도록 참고인 의견서 제출 제도를 도입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당시 법원행정처 심의관이었던 A 판사는 검찰에서 "보고서 작성을 지시받을 때 대법원이 외교부로부터 의견서를 제출받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도 분명하게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후 법정에서는 "지시받을 때 재판부가 의견을 듣고 싶다는 것인지, 외교부가 의견을 제출하고 싶다고 한 것인지 기억에 조금 혼선이 있다"고 진술을 수정했다.
A 판사에게 보고서 작성을 지시한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 B 판사 역시 검찰 조사에서는 "박병대로부터 들은 내용을 전달한 것 같고,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과 관련해 박병대에게 제도 신설에 대해 언급할 만한 사람은 상황상 양승태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이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한 진술"이라며 "당시 박병대로부터 담당 재판부에서 제도 도입을 요청한다거나 외교부의 의견서를 제출받아 재판에 반영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고 물러섰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도 검찰에서는 "양승태가 강제징용 사건의 전원합의체 회부를 검토하는 것을 언급했고, 본인 임기 중에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겠다라는 말도 했다"고 진술했으나 법정에서는 "당시 양승태가 전원합의체 회부를 얘기한 적 없고 쟁점이 많아 시간이 좀 걸린다는 의미였을 뿐 임기 중 사건 처리를 지시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재판부는 "이 전 기조실장은 검찰 조사 당시에는 자신이 피의자 신분으로 수차례 수사받아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라서 기억이 불분명함에도 검찰의 수사 방향에 맞게 추측적 진술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며 "이후 곰곰이 돌이켜 생각하니 부정확한 진술이 있다고 생각돼 법정 증언 과정에서 바로 잡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토대로 "혐의 사실에 부합하는 듯한 이 전 실장의 검찰 진술보다는 이를 번복한 법정 진술이 더 신빙성 있다"고 판단했다.
"인사모 보고했지만…" 양승태 공모 부인한 진술들
국제인권법연구회 및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 와해 시도에 관해서도 판사들의 법정 증언이 검찰 진술과 달라졌다.
이 전 위원은 검찰에서 2015년 윤리감사관이 작성한 '커뮤니티 소모임 개설에 관한 검토' 문건을 양 전 대법원장에게 보고했다고 진술했으나 법정에서는 "인사모라는 소모임에 대해 보고한 기억은 나지만, 이 문건으로 보고한 기억은 없다"며 진술을 번복했다.
또 대법원 특별조사단 조사에서는 "박병대가 인사모를 없애라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고 진술했으나 법정에서는 "박병대가 그런 언급을 한 사실이 없고 국제인권법연구회 내에 인사모와 같은 소모임이 있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말한 사실은 있다"고 했다.
전문분야 연구회 개선방안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당시 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 C 판사는 검찰에서 "보고서가 양승태에게 보고됐다고 들었다"고 했으나 법정에서는 "임종헌이 구체적으로 양승태에게 보고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느꼈던 것"이라고 진술을 변경했다. 임 전 차장도 양 전 대법원장에게 보고서를 전달했는지에 관해 증언을 거부했다.
결국 재판부는 인사모 와해 시도를 위한 각종 보고서 작성 지시에 대해 임 전 차장이 직권을 남용한 것은 맞지만 양 전 대법관 등의 가담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보고 무죄 판단했다.
young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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