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수의 視線] “운동권이라고 함부로 차지 마라”
강원도에 사는 86세대의 이유있는 항변
필자는 1960년대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어려서부터 줄곧 강원도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강원도 소재 대학에 다니던 중 동료 학생들과 함께 민주화 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교내에 사복 경찰들이 상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에 의해 체포돼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4일간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4일째 아침, 경찰 간부로부터 군대에 입대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날 저녁 필자는 화천 전방부대 신병교육대로 ‘공간 이전’했다. 아니, 공간 이전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신체검사도 없었다. 강제징집이었다.
군대에서는 ‘특수 학적 변동자’로 늘 감시를 받았다. 당시 보안대(현 국군기무사령부)는 전담 감시원으로 하여금 필자의 군 생활 일체를 보고 받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몇 년 전 기밀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그럼에도 국방부 시간은 흘러 1985년 마침내 전역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86년 복학했다. 필자가 복학했던 당시는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었다. 특히 1987년 들어서자, 서울대 박종철 학생의 고문치사와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로 인해 국민적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6월 민주항쟁이 타오른 것이다. 그 현장에 있었던 필자도 요즘 사람들이 입길에 오르고 있는 이른바 ‘86 운동권’ 출신인 셈이다.
지난 31일, 한 토론회에 참석한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86 운동권 특권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이라며 이번 총선에서 퇴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과거 운동권이었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 정치의 주류로 자리 잡으며, 국민과 민생은 도외시하고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았다”고 했다. 한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직 수락연설에서도 “386이 486, 586, 686이 되도록 썼던 영수증을 또 내밀며 대대손손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드는 운동권 특권정치를 청산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은 검찰 독재 청산이 더 중요하다며 반박하고 나섰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 3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운동권 청산, 자객 공천 이런 얘기들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지금 청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검사 독재”라고 했다. 86 운동권의 상징 격인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청산 대상은 검찰판 하나회, 검찰 독재”라면서 이번 총선의 시대정신은 ‘윤석열 정권 심판이’라고 받아졌다. 국민의힘의 ‘운동권 청산’ 주장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권 심판’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사실 ‘운동권 청산’이나 ‘검사 독재 청산’과 같은 논쟁은 총선용 프레임 전쟁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 상대를 특권세력이라고 규정하면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려는 네거티브 공격인 셈이다. 4년 전 21대 총선에서도 상대를 향해 ‘친중 정당 대 친일 정당’ 등으로 프레임 공방을 벌인 바 있다. ‘찐박 논쟁’으로 논란이 됐던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친박 정당, 부패 정당이란 공격에 대해 종북 정당, 운동권 정당이란 주장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대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해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멋지게 지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선거는 우선 이기고 봐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거에 유리하다고 해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86세대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정치권에 진출한 운동권 출신들이 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초심을 지키지 못하고 타협했고, 부패했다. 특권의식에 빠져 내로남불의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패거리도 있고, 도덕적으로 문제도 있었다.
그럼에도 86 운동권 세대가 전부 매도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는 정부 선택권을 확보하고 시민의 권리보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한 국민적 삶의 질 향상에 있다. 그것은 공정한 기회와 절차적 정당성,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의 풍성한 삶, 다양성을 갖춘 문화, 삶의 가치 제고다. 기본권이 보장되고, 약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민주주의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를 지키고 발전시켜 온 86세대의 역사는 평가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총선 프레임으로 운동권 청산을 내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경기침체와 물가고, 실질소득 저하, 높은 금리 등으로 국민경제는 매우 어려운 지경이다. 잠깐만 돌아봐도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는 국민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총선의 화두가 돼야 한다. 전쟁 위험에 빠진 한반도 정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저출생과 초고령화, 지역소멸과 기후변화 등 미래를 위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제시해야 한다. 운동권 청산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다.
돌이켜 보면, 86운동권 세대에게만 특별한 역사의식이 있어서 민주화 투쟁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특정한 몇 사람만이 그 대열에 있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폭압의 시대가 청년을 불렀던 것이다. 당시 청년들은 함께 분노하고, 함께 외쳤으며, 함께 민주주의를 이뤄냈다. 그중 일부만이 정치권에 진출했을 뿐이다. 대다수 86 운동권 세대들은 삶의 현장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다. 소시민으로 살면서도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성장시키고자 노력했다. 이제는 꼰대 소리를 듣게 됐지만, 민주화 세대의 자긍심과 함께 미래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진지하고 고민하는 이들도 많다.
‘운동권 청산’ 주장을 접하면서, 문득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떠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정치 양극화의 시대, 어쩌면 퇴행의 시대인지도 모르지만, 강원도에 살고 있는 86세대가 이 시를 인용해 항변한다. “운동권이라고 함부로 차지 마라, 그래도 이들에게는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헌신이 있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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