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은 과학들 위에서 재난 조사가 나아가는 법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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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서울고등법원은 가습기살균제를 만들고 판매한 에스케이(SK) 케미칼, 애경 등의 관계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가습기살균제의 수거 명령이 내려지고, 법 조항이 생겨나고, 재판이 이뤄지는 일련의 재난 조사 과정은 모두 완벽하지 않은 과학들 위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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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맞서는 과학
박진영 지음 l 민음사(2023)
지난 11일 서울고등법원은 가습기살균제를 만들고 판매한 에스케이(SK) 케미칼, 애경 등의 관계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한편, 25일로 예정되어 있던 국가의 손해배상에 대한 항소심 판결은 “마지막까지 신중을 다해서 검토”하기 위해 그 선고가 미뤄졌다. 30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의 구조적인 원인 조사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9일에 국회를 통과한 법안이었다. 다음날인 31일 ‘오송 참사 시민 진상조사위원회’는 시설을 관리하고 홍수에 대비해야 했던 기관들이 안전관리에 실패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모두 지난 한 달 간 있었던 일이다.
“언젠가부터 사회적 재난에 연대하고 그 참사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일이 되었다.” 환경사회학자 박진영은 ‘재난에 맞서는 과학’에서 우리가 ‘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진단한다. 재난 연구자이기에 앞서 뉴스로 재난을 보고, 주변의 안부를 묻고, 또 무력감을 느낀 한 사람으로서 저자는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조사되고 논의되는 현장에 앉아 기록했다. 그리고 재난은 더 이상 특별한 누군가의 일이 아니기에,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던지는 문제들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는 과정을 따라가며 특히 과학의 역할에 주목한다. 독성학자, 임상의학자, 역학자 등 여러 분야의 과학자들은 참고할 만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폐손상의 원인을 조사하고, 피해 규모를 파악하고,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판정 기준을 만들었다. 정부의 요청을 받거나 자발적으로 나선 과학자들은 피해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새로운 과학의 실마리를 얻기도 했다. 그럼에도 과학은 완벽하지 않았다. 과학자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불확실성은 법정에서 책임을 묻는 데 ‘충분치 않은 증거’가 되기도 했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재난 조사에서 우리가 과학의 역할과 한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재난을 조사하는 과학의 불확실성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는 강력한 증거는 어떤 모습일까? 정책적 결정은 얼마나 확실한 과학 위에서 이뤄져야 할까? 우리가 더 확실한 사실을 찾는 데 몰두해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가? 이 책은 재난을 조사하는 정치적 과정과 과학적 과정이 촘촘히 얽힌 ‘정치-과학의 장’이 어떤 모습인지 드러낸다.
저자는 복잡한 사회적 재난을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답을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참사의 ‘해결’에 대단한 성과가 있었다고는 하기 어렵지만, 서로 다른 분야와 가치관을 가진 전문가들이 모이고 부딪치며 증거의 종류와 불확실성의 수준을 타협하며 필요한 결정을 내려갔다는 것이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조사 과정에 대한 저자의 평가다. 그는 사회적 재난의 해결이 더 정확한 과학, 더 전문적인 의견, 더 강력한 증거를 찾는 게임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충분한 근거가 없다’는 말은 과학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법을 고치고, 정책을 만들고, 이해관계를 벗어나 행동에 나서기 어렵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가습기살균제의 수거 명령이 내려지고, 법 조항이 생겨나고, 재판이 이뤄지는 일련의 재난 조사 과정은 모두 완벽하지 않은 과학들 위에서 이뤄졌다.
강연실 국립중앙과학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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