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 핵무기, AI… 그 앞에 선 천재들의 절망과 광기[북리뷰]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송예슬 옮김│문학동네
‘인류 도약’ 과학계 결정적 순간
그 속의 인물 다룬 논픽션 소설
‘맨해튼 프로젝트’ 존 폰 노이만
수학에 대한 믿음 무너지면서
허무·잔인함 빠져 원폭에 몰두
“양자세계 혼란” 자살한 과학자
‘알파고에 좌절’ 이세돌도 등장
1933년 9월 25일,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1880∼1933)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환아 교육 시설에 걸어 들어가 열다섯 살 난 아들 바실리의 머리를 총으로 쏜 뒤 자신에게도 총구를 겨눴다. 앞서 남긴 편지에는 “근 몇 년 물리학계에서 일어난 발전들을 이해하기가 점점 더 힘에 부친다. 노력해봤지만 무기력해지기만 했고 갈피를 잡지 못해 결국은 절망하여 단념하고 말았다”는 토로가 쓰여 있었다.
인류의 과학이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해온 데는 과거와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발을 내딛게 한 몇몇의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2021년 영국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화제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의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가 최근 내놓은 ‘매니악’은 현대 과학계의 결정적 순간들과 그로 인해 격변한 세계,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논픽션 소설이다. 사실에 근거한 허구로 쓰였다.
닐스 보어, 폴 디랙, 볼프강 파울리 같은 물리학 거장들의 존경을 받았던 천재 에렌페스트가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데는 당시 유전병을 앓는 자의 생식능력을 제거하는 우생학적 불임법을 나치가 합법화한 가운데, 그의 아들인 바실리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어 나치로 인한 극도의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자혁명을 필두로 한 당시 물리학계의 변화도 원인이 됐다. 그가 편지에 적은 “근 몇 년 물리학계에서 일어난 발전들”은 양자역학에 관한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기초가 된 양자역학으로 고전 물리학의 오래된 확실성이 무너졌음을 느낀 에렌페스트는 양자물리학이 세상에 내뿜는 혼란에 큰 두려움을 느꼈고 절망했다.
총 세 부분으로 나뉜 책에서 가장 길고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은 ‘인간을 흉내 내는 신’이라 불릴 정도로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이자 ‘작은 악마’라 불릴 만큼 잔인함을 가졌던 수학자·물리학자인 존 폰 노이만(1903∼1957)이다. 책은, 현대 컴퓨터를 탄생시키고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이론을 창시하는 등 20세기 가장 위대한 천재로 불리는 노이만의 유년 시절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일을 시간순으로 주변 인물들의 입을 빌려 서술한다. 헝가리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변을 놀라게 했던 그는 어느 날 미국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원자폭탄 개발에 깊숙이 관여한다. 미국에서 그는 “변절한 수학자이자 돈팔이, 권력과 그 힘을 휘두르는 자들에게 점점 더 끌리는 사람”이 되었는데, 책은 그의 수학을 향한 순진한 믿음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노이만을 바꾼 것은 쿠르트 괴델(1906∼1978)의 ‘불완전성 정리’. 참과 거짓의 논리로 전개되는 수학에서조차 모순이 존재한다는 이 이론은 그의 내면을 뒤흔들었고, 갑작스러운 허무함은 나치의 박해와 더해져 그를 수학의 순수함을 믿는 천재에서 “자네가 사는 세계를 자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는 것”이라 말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원자폭탄 개발의 핵심을 담당했던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일 폭탄을 투하하자고 말한다면 나는 오늘 못할 이유는 뭐냐고 물을 것이다. 다섯 시에 투하하자고 말한다면, 나는 한 시에 못할 이유는 뭐냐고 물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말 이면에는 “소련이 원자폭탄을 자체 개발하기 전에 미국이 먼저 소련에 핵 지옥을 쏟아부어야만 평화가 가능하다”는 확신도 깔려있었다. 하지만 더욱 눈길을 끄는 서술은, “우리가 그 일을 한 건 단순히 나치를 이기려는 광란의 경쟁이 아니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준 선물을 극한으로 작열시킴으로써 인간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고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 때문이었다”는 부분이다. 천재들의 광기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며 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노이만은 삶의 마지막까지 ‘스스로 생각하고 진화하는 기계’를 꿈꿨다. 암으로 투병하다 삶을 마감하기 얼마 전, 그는 컴퓨터나 기타 기계가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답했다.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해야 한다. 언어를 이해해 읽고 쓰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놀 줄 알아야 한다.”
제3부엔 ‘알파고’가 등장한다. 노이만이 꿈꾸었던 그것이다. 3부는 지난 2016년 이뤄졌던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와 인간 이세돌 간의 역사적 대국을 다루는데, 대국에서 가장 의미 있는 수는 두 번째 대국에 놓인 37수였다. 어느 컴퓨터도 둔 적이 없는 수이고 인간이 고려할 법한 수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수천 년간 축적된 지혜와의 급진적 결별이자 전통과의 완벽한 단절이었던 수. 이세돌은 그 이후 “그 수가 놓인 순간, 나는 끝난 거였다. 승리는 이미 알파고의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책의 제목인 ‘매니악’(MANIAC)은 노이만이 만든 컴퓨터의 이름이자, ‘미치광이’라는 뜻을 지닌 영어단어다. 과학사에 격변을 일으킨 천재들의 ‘광기 어린’ 정신세계가 흥미롭다. 412쪽, 1만8000원.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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