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출판이 새 감성 못 따라갈 뿐”[북리뷰]

박동미 기자 2024. 2. 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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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지, 기록전쟁’ 펴낸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출판경향 담는 잡지 ‘기획회의’
25년간 결호 없이 600호 발간
저자들 고뇌·애환 엮어낸 책
“한국 문명자산 극대화된 지금
출판은 방향성 잃어 안타깝다”
독서 전인교육 학교설립이 꿈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이 지난 1일 서울 중구 문화일보사에서 ‘기획회의’ 600호와, 지난 25년간의 애환을 담은 책 ‘잡지, 기록전쟁’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박윤슬 기자

“독자가 사라진 게 아닙니다. 독자들이 원하는 새로운 감성을 출판이 따라가질 못하는 거죠.”

콘텐츠 산업이 격동을 겪고, 모두 출판의 위기를 말하는 시대.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치열하게 잡지를 발행해 온 한기호(65)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국내 출판 시장의 현재를 이렇게 진단했다. 1980년대 20대 중반의 나이로 출판에 입문, 출판 마케터로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킨 한 소장은 IMF 외환 위기 직후인 1998년 격주 발행 출판전문지 ‘기획회의’를 창간했다. ‘잡지의 시대’가 이미 저물기 시작한 때다. 그리고 25년간 단 한 번 결호 없이 600호까지 발간하는 뚝심을 보여줬다. 또한 도서관 잡지 ‘학교도서관저널’을 14년째 발행하며 바른 독서 운동에도 힘쓰고 있다. 잡지시대의 종언에도, 두 종의 잡지를 지켜 온 한 소장을 지난 1일 서울 중구 문화일보사에서 만났다. ‘기획회의’ 600호가 나오기까지의 ‘생존 일기’와 같은 ‘잡지, 기록전쟁’(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이 막 출간된 직후였다. 책은 출판 시장 중심에서 그 흥망성쇠를 지켜본 이만이 그릴 수 있는 책 콘텐츠의 미래이기도 하다.

“제가 아는 것, 가진 것을 다 쏟아낸 시간이었습니다.” 한 소장은 지난날을 이렇게 돌아봤다. ‘기획회의’는 국내 출판 시장 경향과 책 트렌드를 가장 빠르게 전해 온 잡지다. 이슈와 쟁점을 만들고, 작가와 논객을 배출하던 ‘잡지’는 끝났지만, 기획회의는 성실하게 ‘지금, 여기’를 빚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포착해왔다. ‘큐레이션의 시대’ ‘오디오북 출판시장’ ‘학습만화 시장 트렌드’ ‘챗GPT시대의 번역’ 등 지난해 다룬 주제만 살펴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특히 다양한 필자, 저자들을 발굴하는 데 일조했다. 기획회의 필자들은 현장의 사람들이다. 출판사 마케터, 편집자, 온라인 서점 MD, 작은 책방 주인, 북튜버 등 ‘책’이라는 자장 안에 속한 모든 이가 작가가 된다. 한 소장은 “열심히 쓰게 격려했고, 가능성이 보이면 연재를 맡겨 성장시켰다”고 했다. “젊은 필자의 상상력도 중요했어요. ‘다름’이 출판 상상력의 근원이니까요.”

600호 이후 ‘기획회의’는 로컬(지역) 담론을 본격화한다. 그는 “21세기 가장 큰 화두인 기후 위기를 극복하고 불평등을 해소할 실마리가 로컬에 있다”면서 “지역에서 여러 작은 시도를 해보고, 성공하면 널리 알리고, 그렇게 연대하는 작업을 해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지역의 다양한 삶과 생각, 철학이 연결되는 플랫폼도 구상하고 있다. 4년 전부터 기획회의 주요 업무를 모두 후배들에게 일임한 그는 “이 플랫폼을 만들어 내는 건 내 역할이자 책임”이라고 했다. “나야 그동안 잘 살아왔어요. 이제 우리 손주가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줘야 하니까요.”

‘잡지, 기록전쟁’은 그의 23번째 단독 저서다. 두 종의 잡지를 펴내면서, 책도 부지런히 썼다. 제목만 슬쩍 훑어도 시대가 읽히는 귀한 책들이다. 동료나 후배들을 위한 ‘출판 마케팅 입문’에서부터 ‘e-북이 아니라 e-콘텐츠다’ ‘디지털과 종이책의 행복한 만남’ 등 2000년대 초반에 발 빠르게 디지털 시대 출판의 길을 모색한 책도 있다. 또 ‘인공지능 시대의 삶’ 등 급변하는 세계를 살아내기 위한 지침서도 시의적절하게 펴냈다.

한 소장은 “과거에 쓴 책 속 담론들이 이제는 흔한 현실이다”라면서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인데 그때는 격렬한 반론에 부딪혔다”며 웃었다. 예컨대 1990년대 말 브리태니커 사전이 종이 책 출간을 중단했을 때 여기저기서 책의 죽음, 출판의 몰락을 이야기했으나 그는 달랐다. “‘아날로그’(종이책)는 ‘디지털’을 이용해 변신하는 것이지 사라지지 않는다”고 줄곧 강조했다. “어서 새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다소 거친 발언도 했죠. 불난 집 보는 심정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다급한 심정과 안타까움은 지금도 계속된다. 한 소장은 책을 둘러싼 국내 상황을 떠올리면 “참담하다”고 했다. 한국의 기술적, 문명적 자산이 극대화된 때지만, 여전히 출판은 방향을 못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출판문화협회의 갈등을 언급하며 쓴소리도 했다. “얼마나 좋은 시절입니까. 출판도 확 치고 나가야 하는데, 내 편 네 편 싸우고만 있지 않습니까.”

잡지 생태계가 황폐해진 21세기 한국에서 두 종의 잡지를 지키며 전쟁같이 살아왔는데, 그는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다”고 했다. “독서를 모델로 한 학교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은 한 소장은 “교육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평생 책과 함께한 삶이니, 독서를 통한 전인교육을 한번 실현해 보고 싶다. 그는 오래전부터 “학력 사회는 지고, 학습력 사회가 온다”고 주장했다. 이는 ‘티칭’(가르침)보다 ‘러닝’(배움)을 강조한 말. 그가 상상하는 배움터에선 아이들이 암기도 하지 않고, 시험을 보지 않고, 그저 매일 한 권의 책을 읽는다. “100권쯤 읽었을 때, 아이는 자신의 가능성과 꿈을 알게 될 겁니다. 그게 교육이지요. 그런 학교가 제 생의 마지막 사업이 될 것 같습니다. 아, 기획회의 1000호 발행은 너무 당연하고요.”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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