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도그데이즈' 윤여정 "반추하는 나이 77세…늙을수록 외로운 연습 해야죠"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자극적이고 센 소재에 지친 관객이라면 올 설 연휴엔 '도그데이즈'(감독 김덕민)가 답이다. 앞서 '그것만이 내 세상', '영웅'의 조감독으로 활약했던 김덕민 감독의 첫 연출작으로, 반려견을 향한 사랑을 중심에 둔 유쾌한 이야기가 예비 관객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는 가운데 주연 배우 윤여정을 1월2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감독님 때문에 했어요. 저는 너무 오래 한 배우라 돈 많이 주는 작품은 저한테 안 들어와요. 그래서 언젠가 결심했어요. 감독을 보기로요. 그럼 돈을 안 봐야지. 이번엔 감독님만 보고 선택했어요. 오래 전에 만난 사이에요. 김덕민 감독이 조감독일 때니까 현장에서 제대로 취급을 못 받았어요. 저도 그랬고요. 그때 전우애 같은 게 생겼던 것 같아요. 19년 동안 조감독으로 일하는 걸 보면서 '감독님이 입봉하면 내가 꼭 하리라' 했는데 그 결심을 이뤘죠. 조감독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줘요. 제가 사람을 잘 봐요.(웃음)"
윤여정이 맡은 배역은 세계적인 건축가 민서다. 젊은 시절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뒤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반려견 완다와 함께 조금 쓸쓸해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낸다. 어느 날 잃어버린 완다를 찾기 위해 자신의 집에 배달을 오던 진우(탕준상)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연출을 맡은 김덕민 감독은 당초 시나리오에 윤여정의 본명을 배역 이름으로 붙였을 만큼 윤여정 캐스팅에 정성을 들였다.
"나랑 비슷하게 써놨으니까 그냥 나같이 하면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다 실제 내 옷을 입고 연기했어요. 의상 값 하나도 안 들었어요. 원래 내 옷을 입고 촬영하진 않는데 이번엔 처음부터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었죠. 민서처럼 외로운 순간이 제게도 늘 있었죠. 사실 외로운 연습을 해야 해요. 늙어가는 건 외로운 것이거든. 어떤 유명한 사람이 '늙을수록 외로워지라'고 하던데요. 난 외로운 걸 좋아해요. 가만히 혼자 있는 게 좋아요."
얼핏 까칠해 보이지만 반려견을 사랑하는 따뜻한 내면을 가진 민서는 손자뻘인 진우와 유쾌한 케미로 극에 생동감을 더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챙기는 두 사람의 세대를 초월한 우정은 뜻밖의 웃음과 감동을 안긴 포인트였다.
"(탕준상은) 잘하는 배우였어요. 원래 젊은 배우들이랑 연기할 때 '어머니 몇 살이시니' 묻곤 하는데, 얘는 아버지가 1975년생이라기에 깜짝 놀랐어요. 내 아들이 1975년생이거든요. '배우를 너무 오래 했구나' 싶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건 차에서 내려서 라면 먹고 가라고 하는 장면이었어요. 애드리브를 하고 싶어 하더라고요. 그래서 '진짜 하고 싶냐, 그럼 해보라'고 했더니 결국 틀려서 못 하더라고. 애드리브가 쉬운 게 아닌데 그런 걸 보면 우습기도 하고 귀엽죠.(웃음)"
진우를 너른 품으로 안아주고 이끌어주는 민서는 이미 수많은 후배들의 롤모델로 꼽히는 윤여정과 꼭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윤여정은 젊은 세대에게 따끔한 직설을 건네는 민서를 관록 있는 연기로 그려내며 이야기에 무게감을 더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론 충고나 조언을 싫어한다"고 털어놨다.
"늙으니까 노여움이 많아져요. 특히 애들한테 당했을 때요. 어떤 애가 괜찮아보여서 도와주고 밀어줬는데 날 등쳐먹으려고 했을 때 진짜 싫더라고요. '아직도 내가 배신을 겪어야 하나, 이건 끝이 안 나는구나' 싶었어요. 그래도 난 청년들 보면 충고 안 해요. 나랑 다른 세상에 사는데 내가 감 놔라 배 놔라 한다고 들을 리도 없고 오지랖이죠. 솔직히 젊은이들 보면 눈에 걸리는 게 많아요. 여러분이 늙은 사람 보면 걸리듯이. 근데 그걸 얘기하면 '꼰대'라고 하니까 주의하는 거예요. 롤모델이란 말도 우스워요. 내가 왜 롤모델이에요?(웃음) 자기네 인생 살면 되지 왜 남을 롤모델로 삼나요. 내가 산 인생과 그들이 살아야 하는 인생은 달라요. 내가 이렇게 살았다고 해서 롤모델로 삼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조용히 묵직한 '돌직구'를 던지는 민서는 윤여정의 쿨하고 당당한 매력과 만나 더욱 폭발력 있는 캐릭터로 살아 숨 쉴 수 있었다. 건축가로서 성공했지만 고독했던 민서처럼, 윤여정에게도 화려한 순간 뒤 느끼는 감정은 따로 있었다. 지난 2021년 영화 '미나리'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이후 주연 러브콜이 쏟아졌지만 그는 오히려 씁쓸했다고 털어놨다.
"참 인간이란 간사한 것 같아요. 갑자기 상 탔다고 주인공 섭외가 들어오잖아요.(웃음) 하나 마음에 걸린 건 아카데미상을 좀 일찍 탔다면 엄마가 신사임당 상을 타셨을텐데 그게 좀 미안해요. 그걸 타도 아까운 사람이거든요. 서른넷에 청상과부가 됐는데 집도 절도 없이 공무원 시험 보고 우리 셋을 먹여 살렸어요. 대단하고 진짜 멋있었어요. 멋있는 옷을 입고 멋있게 말해서가 아니라, 분수를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었어요. 엄마 명언이 많은데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린다, 우리가 이렇게 알거지가 될 줄 알았겠니, 열심히 일해서 저금해라' 그런 말씀도 기억에 남네요. 최근에 누군가 '선생님은 건물도 없으세요?' 하면서 놀리던데 저는 상관없어요. 77세라는 나이에 지금도 일을 해서 수입이 있잖아요. 우리 엄마 딸로서 하나도 손색이 없죠. 엄마도 돌아가실 때까지 자기 돈 다 쓰고 가셨어요. 우리 준다기에 세금 맞으니까 싫다고 했죠."
1966년 TBC 3기 공채 탤런트 데뷔 이후 무려 60년 가까운 세월을 배우로 살아온 그에게 이제 연기와 작품은 단순한 직업을 넘어 삶 그 자체다. '미나리'에 이어 3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 '도그데이즈'의 개봉을 앞두고 윤여정은 "연기가 평생의 업이란 게 피로할 때도 있지만 이제 반추하는 나이가 돼 보니 다 수업이었다"며 지난날을 돌아봤다.
"처음엔 돈 벌려고 아르바이트로 연기를 시작했죠. 내가 지금부터 얘기하는 어린 시절은 여러분이 대부분 태어나기 전, 반세기 전 이야기에요. 우리 땐 여자는 무조건 시집가야 했어요. 시집을 안 가면 동네에서 '저 집 딸은 문제가 있다'며 손가락질하던 시대였어요. 그렇게 시집가고 일을 그만두는 게 자연스러웠고요. 저도 그랬죠. 그리고 어쩌다 다시 배우를 하게 됐을 때, 전 그때 진짜 배우가 된 것 같아요. 아무리 대기업에서 잘나가던 여자라도 10년 공백 후에 다시 써줄 리가 없잖아요. 근데 나한테 일을 주니까 고마웠죠. 예전엔 먹고 살려고 연기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다 내가 받은 수업이었네요. 그렇게 살다보니 이제 바라볼 것보다 돌아볼 것밖에 없는 노배우가 됐어요."
스포츠한국 조은애 기자 eun@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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