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전쟁터로 떠나고 우린 경기장에서 싸웠다”
러시아 총탄에 대모 잃은 소피아
‘우크라 알린다’ 비장함 품고 경기
“한국인들 응원해줘서 감사해요”
경기 시작 2분 전. 은반 위에 올라선 소피아 레쿠노바(15·우크라이나)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관중석 앞자리에 앉은 그는 스마트폰 화면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띄운 뒤 소피아를 지긋이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울음이 터질 뻔했어요.” 열연을 마친 소피아는 제일 먼저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도 2024 강원겨울청소년올림픽에 44명의 선수를 보냈다. 44명 중 피겨스케이팅 종목에 출전한 선수는 3명인데, 소피아와 바딤 노비코프(17)는 각각 아이스 댄스와 남자 싱글 종목에 출사표를 던졌다. 페단킨 데니스(15)와 팀을 꾸린 소피아는 12개팀 중 11위(총점 93.21)로, 바딤은 총점 160.64점으로 18명 중 14위로 생애 첫 올림픽을 마감했다. 소피아와 바딤 모두 “실수가 있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결과에 만족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두 사람의 준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5살 때부터 부모의 권유로 피겨를 시작했던 바딤은 러시아의 계속된 공습 위협 탓에 고향인 오데사를 떠나 슬로바키아에서 올림픽을 준비했다. “아버지는 우크라이나가 더는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해 저만 외국으로 피신시켰어요. 지금은 3개월에 한 번씩 가족을 보러 가고 있어요.” 담담한 어조로 고향의 상황을 전한 바딤은 “오데사에서 스케이트를 연습할 수 없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언젠가 상황이 나아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고향을 떠난 소피아는 홀로 연습을 이어가다 2022년 여름이 돼서야 파트너와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연습장이 있는 키이우 또한 안전한 지역은 아니에요. 하지만 코치와 파트너가 거기에 있기에 저도 키이우에 있어야 해요. 앞으로도 계속 키이우에서 연습할 겁니다.” 소피아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소피아는 전쟁으로 가족과도 같은 이를 잃었다. 그의 대모는 차를 타고 대피하던 중 길목을 지키고 있던 러시아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고국에서 수많은 이웃과 가족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참가한 올림픽 무대. 우크라이나 선수단에게 이번 대회는 메달 색을 다투는 올림픽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피아는 “우리는 이곳에서 어려운 상황에 놓인 우리나라를 알려야 한다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왔다. 비록 내가 메달을 따진 못했지만, 우크라이나 대표로 다른 선수들과 경쟁할 수 있어 영광이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선으로 떠나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던 바딤에게는 올림픽 무대가 자신에게 주어진 전쟁터였다. 바딤은 “많은 친구가 이미 전쟁터로 떠났다. 제게 주어진 일은 올림픽에 참가해 국가를 대표해서 싸우는 것이고, 이런 모습이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는 만 60살 이하 남성은 전쟁에 동원돼야 하기에 국경을 넘을 수 없다. 선수들도 예외일 순 없다. 우크라이나 선수단 언론 담당자 막심 체베리아카는 “이미 축구, 농구 등 전문 스포츠 선수 300여명이 전장에서 숨졌다”고 설명했다.
두 선수 모두 한국땅을 처음 밟았지만, 한국 문화는 낯설지 않다. 블랙핑크, 방탄소년단(BTS) 등 케이팝 스타의 이름을 줄줄 읊기도 했다. 둘은 올림픽에선 우크라이나를 향한 한국 사람들의 따스한 눈빛도 확인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는 강릉 아이스아레나 관중석을 수놓은 우크라이나 국기를 꼽았다. “우리를 응원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우크라이나에는 이런 지지가 정말 중요하고 많은 도움이 돼요.” 떨리는 목소리로 소피아가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이번 대회에서 남자 스켈레톤에서 야로슬라프 라브레니크가 은메달을, 바이애슬론 여자 스프린트 종목에서 폴리나 푸츠코가 동메달을 따냈다. 온전히 훈련에 집중하지 못한 상황에서 얻은 뜻밖의 성과다. 선수단은 2일 우크라이나로 돌아간다.
강릉/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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