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상 『김섬과 박혜람』 임택수 “실패하더라도, 중간에 꺾이더라도 계속 나아가기를”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4. 2. 2.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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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팔 톤의 청동으로 만든 통일대불 앞을 지나칠 때에도, 그놈의 한 생각은 도대체 사라지지 않았다. 글을 쓸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곳에 대한 기억과 아쉬움. 하심을 갖도록 한 보제루 아래를 지날 때에도.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극락보전 앞에 섰을 때에도. 그래, 그곳에서 보낸 지난 십여 년의 시간을 정리해야겠구나.

그러니까 1997년, 그는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곧이어 한국에선 IMF(국제통화기금)체제가 닥쳐왔다. 이미 오래 전 가장 좋아한 누나를 잃었던 그는 또 다른 누나마저 떠나보내자 잠시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해 한동안 한불문화재단에서 일했지만, 공부를 위해 2003년 다시 프랑스로 나갔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통역 등을 하다가 2010년에야 귀국했다. 십여 년 넘게 프랑스와 그 문화의 자장 속에 살아온 그였다.
임택수 세계문학상 수상작가.
무엇인가를 정리한다는 건, 그에겐 글쓰기였다. 글도 쓰고 일도 하기 위해서 소설책 몇 권을 챙겨서 설악산 신흥사로 내려왔다. 그는 신흥사 템플스테이 팀장으로 일하면서 2018년 봄부터 글을 써내려갔다. 처음에는 옴니버스 형식의 단편 모음집을 생각했는데, 점점 하나의 장편으로 바뀌어갔다. 프랑스라는 공간도, 표준화된 성 지향성 경계 밖에 있는 인물도 포함됐고.

올해 신문사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임택수는 방황을 거듭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인생행로를 찾아나가는 두 여성을 형상화한 장편소설 『김섬과 박혜람』으로 제20회 세계문학상을 거머쥐었다.

프랑스에서 도슨트로 활동한 박혜람은 폭설 속에 어렵게 귀국하지만 짐을 분실해 오랜 친구인 김섬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된다. 혜람은 타투이스트인 섬의 달라진 일상을 알아채지만, 섬은 어느 날 오랜 감정의 찌꺼기를 터뜨리며 우정은 일대 위기를 맞는다. 혜람은 강원도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새 생활을 시작하고, 섬은 헤어진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되고 새 시작을 위해서 결단을 내리는데.

“어디서 왔는지 작은 벌레 한 마리가 테이블 위를 기어 다녔다. ‘이게 뭘까요?’ 김섬이 말했다. 남자는 김섬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죽은 듯이 걸음을 멈추고 꼼짝하지 않는 벌레 한 마리. ‘소나무허리노린재네요.’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 왔을까?’ 남자는 벌레가 들어온 입구라도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작품은 한국과 프랑스, 과거와 현재를 절묘하게 교차시키면서 타투이스트 김섬과 도슨트 박혜람 두 여성의 만남과 갈등, 연대 서사를 깊이 있게 구축하면서 삶과 사랑, 생명에 대한 사유를 철학적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모든 이가 꿈을 꾸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또한 대부분 인간의 삶이다. 소설은 바로 그 꿈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보낸다. 실패해도 살아가야 하고, 그리고 살아갈 수도 있다고.

올해 신춘문예 단편소설과 장편공모상인 세계문학상을 동시에 거머쥔 젊은 작가 임택수가 그린 현대 여성들의 꿈과 사랑과 좌절과 도전의 서사는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갈까. 임 작가를 지난달 23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이번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선 시간과 함께 자기만의 책상이 필요한데, 그런 시간과 공간이 마련되지 않아서 힘들었다. 산사라는 곳은 온전히 작업을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오후 2시 입실하면 다음 날 오전 11시 퇴소할 때까지 완전히 매여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만 집중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일과 창작의 밸런스를 잘 잡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작품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인데(이번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소설 주인공 역시 여성이었다).

“남성 인물을 쓰지 않는 건 아니지만, 친근하게 여성 인물에 더 집중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여성성의 유연함을 선호하는 것 같다. 잘 몰라서 오히려 집중을 할 수도 있었고. 이번 작품에선 아이를 키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했는데, 자신의 몸 일부로 직접 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여성의 생각이 남성과 다를 수 있어서 특히 어려웠다.”

―두 주인공의 직업도 타투이스트(김섬)와 도슨트(박혜람)로 현대적 직업인데.

“제가 그림에 관심이 많고 도슨트 친구도 있다. 친구의 얘기를 참고했고, 도움도 컸다. 타투이스트의 경우 주변에 사람은 없지만, 요즘 타투를 하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불안한 시대, 자기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수단 같았다. 김섬에게 잘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개인적으로 타두를 새기고픈 욕구는 아직 없다. 바로 위의 형이 청소년 때 발목에 장미를 하나 새겼다가 담뱃불로 지우는 걸 본 적이 있다. 작품에선 정체성을 표현하거나 흉터를 가려주는 타투의 긍정적 기능을 더 보여주려 했다.”

―독자와 함께 공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는지.

“박혜람은 파란의 과정을 거친 뒤 설악산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하게 되는데, 돌아올 때도 갈 때도 이유는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어떻게 보면 좀 실패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패한 사람들, 어떤 중단된 삶을 사는 사람들, 계획과는 좀 어긋나게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로를 건네고픈 마음이었다. 거기엔 나 자신도 포함된다. 중간에 꺾이더라도 계속 나아가기를 바라는 위로나 격려를 하고 싶었다.”

“택수야,” 어느 날 초등학교 5학년생 임택수는 담임선생 앞으로 불려갔다. 담임은 그에게 검은 갱지 뭉치를 건네며 차분하게 말했다. “너는 글을 잘 쓰니까, 매일 글쓰기 연습을 해야 한다. 매일 일기를 쓰도록 해라.”

그는 이때부터 매일 일기를 썼다.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선생에게 확인을 받았다. 매일 글을 쓰면서 자신의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실력도 늘어갔다. 거짓말도 함께. 글쓰기는 6학년 때에도 이어졌고, 교내 작문상도 곧잘 받곤 했다. 글쓰기의 작은 씨앗이 뿌려진 시기였다.
임택수 세계문학상 수상작가 /2024.01.23 허정호 기자
검정고시를 통해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극단에서 지원을 해주겠다고 해서 처음에는 서울예대 연극과를 지원하려 했다. 막상 원서를 내기 위해서 서울예대에 갔다가 자신이 좋아했던 시인 김혜순과 오규원, 소설가 최인훈, 박기동이 연극과가 아닌 문예창작과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헌책방을 전전하며 독학하던 그에게 문학의 빛을 뿌려주던 그들이….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겨울, 그는 진주에서 서울로 이사하는 과정에서 학교를 그만뒀다. 열다섯 살 소년은 을지로 입구 인쇄골목에 위치한 인쇄소 앞에 홀로 섰다. 키는 컸지만 나이가 어려서 자신보다 세 살 많은 형이라고 속이고 인쇄공으로 일했다. 1992년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9년여 온갖 일을 전전해야 했다. 인쇄공, 공사판 인부, 전화기 보조 상품 영업직, 한식당 주방장, 재단사, 음악다방 DJ….

독학을 하던 그는 이때 헌책방에 깔린 청하출판사의 책들을 모조리 탐독했다. 알베르 까뮈를 읽자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이 눈에 들어왔다. 김혜순과 오규원 시집, 최인훈, 박기동의 소설을 만났다. 지방에 살던 누나가 두고 간 알베르 까뮈의 잠언집에 심취하기도 했다.

문창과 92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1학년 때에는 김혜순 시인의 작품을 보며 시를 썼다가 소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그에게 소설 쓰기를 권하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습관처럼 글을 썼다. 큰 각오를 하진 않았지만, 꾸준히 신춘문예에도 응모했다. 취미생활이 아닌 글쓰기를 위한 독서도 계속 했고. 조세희, 김원일, 이동하, 박기동, 최인호 등 1970년대 작가들은 문청의 여로에 작은 등불을 비춰졌다. 소설가 임택수의 원점이었다.

1968년 진주에서 기울어가는 유지 집안의 10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임택수는 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면서 등단한 데 이어서, 제20회 세계문학상도 수상했다.

―올해 신춘문예 단편소설에 이어서 장편공모상인 세계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했는데.

“20여 년 전, 신촌에서 사주명리로 소문난 대처승이 제가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일은 평생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번 생에선 당선이 없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왜 글을 쓰는가, 하고 물으면 뾰족한 답도 없지만, 꾸준히 신춘문예에 응모해 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번에는 일이 바빠서 동아일보에만 단편과 중편을 냈고, 장편은 세계문학상에만 응모했다. 한 20년 동안 다른 사람들의 당선을 ‘수희찬탄’하다가 이제야 축하를 받아서 조금 낯설고 남의 옷을 입은 것 같다. 더구나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세계문학상에 동시에 당선돼 조금 조심하고 있다(웃음).”

―작품과 작가로서의 포부는.

“저의 형제가 10남매인데, 장기적으로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40~50년간 대가족이 지나온 이야기, 대가족 일기를 한번 써보고 싶다. 한편으론 제가 지금 불교계에서 일을 하는데, 여기에서 만나는 인연과 사람들 역시 만만치 않더라. 그분들이 지나온 개인적 역사에도 귀 기울이고 싶다. 단기적으론 어떤 질문들이 곧잘 일어나는데, 그런 것들에 천착하며 글을 쓰는 것이다. 작품 하나로 작가의 전 생을 판단할 수는 없다. 여러 작품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성장하는지 독자 분들이 지켜봐주시면 좋을 것 같다.”

매일 새벽 3시 50분이 되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다. 방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자리를 정리한다. 새벽 4시 반부터 법당으로 올라가 새벽예불을 하고, 새벽 5시부터 『금강경』 기도를 드린다. 새벽 5시 반부터 방으로 돌아와 인터넷 검색으로 일을 시작하고, 오전 8시에는 사무실로.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절을 찾는 오후 2시부터 일정이 시작돼 다음 날 오전 11시까지 일에 꽁꽁. 2013년부터 조계사와 설악산 신흥사 등에서 템플스테이 업무를 해온 소설가 임택수는, 지난해 8월부터 지방의 한 사찰에서 템플스테이 업무를 하고 있다. 그에게 삶과 인연은 순간순간이 소설이고, 그 소설은 다시 순간순간 삶과 인연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삶과 소설은 그렇게 영원으로, 선(禪)으로….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허정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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