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성착취 접하고 충격…남성 청소년 성교육 필요성 절감”
국내 첫 남성 청소년 성교육 기관
“남성들이 청소년 시기에 건강한 성인지 감수성을 갖지 못한다면, 향후 더 나은 세대의 출현을 기대할 수 없다. 대한민국을 지금보다 더 성평등한 사회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은 남성 청소년 성교육에 있다.”
‘남다른성교육연구소’(이하 연구소)의 고상균(49) 소장은 지난달 26일 한겨레와 만나 남성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전문기관을 설립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연구소는 국내 첫 남성 청소년 특화 성교육 전문기관으로, 지난달 9일 출범했다.
고 소장이 남성 청소년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결정적인 계기는 2020년 세상에 알려진 ‘텔레그램 엔(n)번방 성착취’ 사건이다. 당시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판매하거나, 성착취물을 돌려본 가해자는 모두 남성이었고, 이들에게 성폭력은 놀이에 불과했다. 그는 “한국에서 성교육이 진행된 지 수십 년이 됐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너무 충격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부터 남성 청소년의 ‘남성성’을 해체하는 교육에 대해 함께 고민하던 성교육 강사·청소년 성문화 활동가,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등 20여명이 연구소 설립에 마음을 보탰다. ‘남성성’이란, 남성에게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는 말이나 사고, 행동 등을 일컫는다.
올해로 3년째 성평등 강사로 활동 중인 고 소장은 주로 남학생들만 다니는 학교에서 성교육을 진행해왔는데, 갈수록 페미니즘, 젠더, 등 성교육에 거부감을 느끼는 남성 청소년이 많아지는 것을 느낀다. 남성 청소년들의 성별 고정관념도 초·중·고교로 갈수록 강해졌다. 이런 상황은 그가 더욱 “여성을 차별하고 폭력 대상으로 바라보는 ‘남성성’ 규범이 남성들 사이에서 더는 공고해지지 않도록 청소년 시기를 변화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느끼게 했다.
‘여자는 군대 안 가는데, 남성 역차별 아니에요?’ ‘남성은 모두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인가요?’는 성교육 현장에서 받는 단골 질문이다. 그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사례와 통계를 들어 설명한다. 예를 들어 군대 역차별 질문에 대해선 학생들에게 남자만 군대에 가도록 한 것은 누구인지, 이런 정책 설계는 누가 한 것인지 학생들에게 묻고, ‘질문을 던져야 할 대상은 여성이 아니라 국가’라고 설명한다.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냐’는 질문엔 여성이 남성의 폭력 문제에 대해 민감해하고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을 통계를 근거로 답한다. 2022년 기준 대검찰청 ‘범죄분석’ 자료를 보면 성폭력 범죄 가해자 96.1%는 남성이고, 피해자 80.1%는 여성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고개를 끄덕이는 남학생이 나타난다.”
‘지금은 성차별이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도 자주 받는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남자 중학교는 ○○중학교라고 하는데, 왜 여자 중학교는 ○○여자 중학교 할까요”라고 되묻는다. 고 소장은 “같은 재단법인에서 운영하는 여중, 남중이 있었는데, 두 곳 모두 ‘목련’을 교화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중에서는 목련이 ‘건아의 진취적인 기상’을 뜻한다고 가르쳤고, 여중에서는 목련이 ‘수려한 용모’를 뜻한다고 가르쳤다. 이 얘기를 학생들과 같이 나눴더니 학생들이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미처 생각하지 한 일상 속 성차별 중 하나다. 그는 “이외에도 국회의원 성별 현황(21대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전체의 18.8%) 등의 데이터를 제시하며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남성이 여성보다 누리는 것이 많다는 점을 설명한다”고 말했다.
고 소장은 3년 동안 성교육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느낀 점을 담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하는 연구소의 교육에 반영할 예정이다. 연구소가 진행하는 성교육은 ‘맨 박스’(Man Box·사회에서 남성에게 요구하는 특성과 자질 등)를 해체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키가 크지 않거나 근육이 발달하지 않은 남성, 군대에 가지 않은 남성도 ‘남성’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또 ‘권력 보행’ 프로그램을 통해 스스로 얼마나 권력을 누리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예를 들어 ‘밤 12시에 불 꺼진 길을 혼자서 걸어갈 수 있는지’를 물어 ‘걸어갈 수 있다’고 하면 한 발 앞으로 나가고, ‘무서워서 그럴 수 없다’고 하면 뒤로 물러나는 식이다. 이를 통해 남성보다 여성이 사회에서 더 많은 불안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한다.
초·중·고교 및 대학은 물론이고 여러 소모임, 양육자 및 가족 단위를 대상으로도 성교육을 진행할 계획이다. 성차별 구조를 이해하고 남성성을 해체하는 교육이 일상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 연구소의 목표다. 또 오는 4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연 2회로 남성 청소년 성교육 전문 잡지를 발행할 예정이다. 잡지엔 남성 청소년들이 직접 말하는 성에 대한 이야기와 남성 청소년을 주제로 한 국내외 조사·연구 등이 실린다. 이와 함께 연구소는 성폭력을 저지른 남성 청소년 가해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도 진행할 예정이다.
고 소장은 “페미니즘은 여성 차별로 상징되는 사회적인 억압과 차별 문제를 우리가 인식해서 사회 전체가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며 “페미니즘은 남자를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남학생들이 알길 바란다”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고발장 전달 앞 윤석열-한동훈 통화 급증…손준성 ‘윗선’ 밝혀질까
- 맨유서 뛴 린가드 FC서울 오나…“2년 계약 구두 합의한 듯”
- ‘김건희 유흥주점 근무’ 주장 안해욱 구속영장 기각
- 박정훈 “김계환 사령관에게 충성으로 보답했는데 가슴 아프다”
- 1월 소비자물가 2.8%밖에 안 올랐다는데…마트 물가는 왜 이래
- 오늘 서쪽지역 고농도 미세먼지…주말엔 낮 최고 12도
- 윤 대통령, 오는 7일 특별대담…KBS 녹화 방영 예정
- 선거제 ‘좌고우면’ 이재명…“명분도 리더십도 다 잃어”
- 통근시간 안 줄고, 80억 적자도 난다는데…오세훈, 리버버스 강행
- ‘손준성 헌법 위반’ 확인…헌정 사상 첫 검사 탄핵 가능성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