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법 [세상읽기]

한겨레 2024. 2. 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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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에도 확대 적용됐다. 노동부에 따르면 새로 중대재해처벌법 테두리 안에 들어온 5∼49인 사업장은 83만7천 곳으로, 종사자는 800만 명가량이다. 상시 근로자가 5인 이상인 개인사업주 역시 법 적용 대상이다. 사진은 지난 28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의 한 공사현장. 연합뉴스

김인아 | 한양대 교수(직업환경의학)

노동자 건강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노동보건의 역사가 노동자들의 죽음과 고통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경험하지 않은 이전의 역사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직접 경험하고 기억하는 시기 이전에도 노동자들 건강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일들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모아진 여론은 관련 법률 제·개정으로 이어졌다.

노동자들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인 산업안전보건법은 1981년 12월 제정되었다. 이후 정책적 필요와 사회적 요구에 따라 일부 조항들이 개정돼왔는데, 1990년 1월과 2019년 1월엔 내용이 대폭 수정(전부개정)됐다. 앞서 1987년 원진레이온에서 일하던 정근복씨 등 노동자 4명이 직업병 판정과 보상을 요구한 것을 시작으로 1990년대 초반까지 노동자 수백명이 직업병 판정을 받게 됐다. 17살 노동자 문송면이 수은 중독으로 사망한 것도 1988년이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직업병 사건들이 사회적으로 주목받았다.

이런 일련의 사건 뒤 1990년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 이유서에는 “사업장 안전보건관리체제에 있어서의 제반 문제점을 해소하고 자율재해예방활동이 촉진될 수 있도록 하며, 산업재해예방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산업재해예방기금을 설치하여 산업재해의 감소와 근로자의 안전과 보건을 유지·증진시키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개정안은 산업안전보건에 있어서 정부의 책무를 규정하고 노동자 대표의 요구가 반영될 수 있도록 했다. 또 안전보건관리 규정이나 산업안전보건위원회 등 조직을 사업장 안에 갖추도록 하였다. 일터의 산업안전보건에 노동자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노동자 건강보호가 사업주뿐이 아니라 국가의 책임임을 명시한 것이다. 이후 1991년엔 사업주의 노동자 건강보호 의무를 강화하는 종합대책이 발표됐다.

2019년 두번째 전부개정에는 김용균이라는 노동자의 죽음이 있었다. 2018년 12월11일 오전 3시20분께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진 채 발견된 24살 비정규직 청년의 죽음은 그동안 종종 제기되던 ‘죽음의 외주화’ 문제를 전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전에도 수많은 하청 노동자가 일터에서 사망하고 있었다. 2016년 서울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끼여 사망한 20살 청년도 하청 노동자였다. 2019년 산안법 전부개정 이유서는 “법의 보호 대상을 다양한 고용형태의 노무제공자가 포함될 수 있도록 넓히고, 근로자가 작업을 중지하고 긴급대피할 수 있음을 명확히 규정하여 근로자의 작업중지권 행사를 실효적으로 뒷받침”한다, “유해·위험성이 매우 높은 작업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도급을 금지하고, 도급인의 관계수급인 근로자에 대한 산업재해 예방 책임을 강화”한다고 밝히고 있다.

2021년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 역시 많은 이들의 죽음에 뿌리내리고 있다. 특히 2020년 4월 경기 이천 물류센터에서 발생한 화재로 노동자 38명이 한꺼번에 숨지면서 법 제정은 급물살을 탔다. 중대재해법 제정 이유서에는 “현대중공업 아르곤 가스 질식 사망사고, 태안화력발전소 압사사고, 물류창고 건설 현장 화재사고와 같은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사고와 함께 가습기 살균제 사건 및 4·16 세월호 사건과 같은 시민재해로 인한 사망사고 발생 등이 사회적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며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이 법안 제정의 뿌리임을 밝히고 있다. 김용균씨 어머님은 중대재해법 제정을 위해 29일간 단식하기도 했다.

지난 27일부터 중대재해법이 5인 이상~5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 시행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왔다. 준비 안 된 현장 상황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경영상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편에서는 중대재해법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과도한 형사처벌 부담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수십년 동안 산안법을 통해 노동자들의 안전보건을 챙기고 있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필요한 정부의 책무와 사업주의 조치사항 등을 정하고 있었다. 중대재해법 시행에 대비하기 위한 2년의 유예기간도 있었다.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면 좋겠지만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해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은 발생한다. 산안법이나 중대재해법 모두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상되는 어려움과 우려는 모두의 지혜를 모아 함께 해결하고 길을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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