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가족들과 함께한 ‘길바닥’ 박훈규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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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가족들에게 박훈규(51) 독립 PD는 낯선 이름이다.
가족들 따라 방송국에도 가고 당시 청와대에도 가고 그러다 가족들과 체육관에 남게 됐죠.
미수습자들이 한 명씩 줄어들면서 남은 가족에게 생기는 희망을 보니까 그냥 끝까지 다 찾을 때까지 마지막까지 기록해야 한다고 남아 있었어요.
그렇게 가족 곁에서 보낸 시간이 7년 정도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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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가족들에게 박훈규(51) 독립 PD는 낯선 이름이다. 대신 가족들은 그를 ‘길바닥 또는 '길바닥 저널리스트’로 기억한다. 수많은 언론이 있을 때부터 어떤 언론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7년을 거리 위에서 함께했다.
"참사가 터지고 4일 지난 뒤에 내려갔어요. 사실 처음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 섰을 때는 그분들 눈을 쳐다보지 못했어요. 언론에 대한 불신이 커질 대로 커진 때였으니까요. 하지만 현장에서 보던 상황이 TV에서 보던 것과는 너무 달랐어요. 너무 괴리가 크니까 결국 현장에 남아서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처음엔 진도와 서울을 계속 왔다 갔다 했어요. 가족들 따라 방송국에도 가고 당시 청와대에도 가고 그러다 가족들과 체육관에 남게 됐죠. 그때 은화(세월호 2학년 1반 조은화) 엄마랑 다윤(세월호 2학년 2반 허다윤) 엄마가 너무 열심히 싸워가지고, ‘그래 희망이 있다. 부모들이 이렇게 싸우는데 못 찾을 리가 없다. 올해는 찾겠지, 내년에는 찾겠지’ 하며 함께 기다렸죠.
그땐 무슨 특별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활동한 건 아니었어요. 미수습자들이 한 명씩 줄어들면서 남은 가족에게 생기는 희망을 보니까 그냥 끝까지 다 찾을 때까지 마지막까지 기록해야 한다고 남아 있었어요. 그렇게 가족 곁에서 보낸 시간이 7년 정도였어요. 올해가 세월호 10주기인데 얼마 전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고 너무 바뀐 게 없더라구요. 유가족들이 행진하고, 단식하고, 삭발하고…. 특별법인데 여당에서 안 받아주고. 세월호를 잘 마무리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참사는 아니였을까? 그런 생각이 떠나질 않네요."
이명익 기자 sajin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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