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개입 맞지만 재판엔 문제없다는 대한민국 법원

이지혜 기자 2024. 2. 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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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AS] ‘사법농단’ 양승태 무죄 파문
“재판 개입해도 판사가 제어할 수 없다는 선언과 같아”
2015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는 판사 익명게시판까지 통제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사진은 대법원 직원들이 대법원 내 조형물 정의의 여신상 앞을 지나가는 모습.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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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무죄가 선고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 판결은 보면 볼수록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습니다. ‘재판개입’은 있었지만 ‘재판에 문제는 없었다’는 논리는 그중에서 손에 꼽힙니다.

명시적으로 법원행정처(이하 행정처)가 특정 사건에 대한 의견을 재판부에 말 또는 문건으로 전달하는 ‘재판개입’이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정작 재판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것인데요,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은 물론, 사법농단 연루 판사들에 대한 앞선 재판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논리입니다.

판결문까지 수정됐지만…“법관 판단에 따른 판결”

법원 내에서도 현실과 괴리된 판단이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법원이 사실상 판사를 대법원장의 막강한 인사권에서 자유로운 ‘철인’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법원이 ‘재판개입’을 인정한 2015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지방의원들의 행정소송을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행정처가 통진당 행정소송 재판장에게 심증을 확인하고 행정처가 원하는 방향의 법리 문건을 전달한 정황은 인정된 사실입니다. 재판부도 이를 “재판부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동”이며 “재판에 개입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합니다.

사법농단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행정처 개입이 있고 나서 실제로 선고기일은 두달여 뒤로 연기됐고 선고 뒤엔 행정처가 원하는 방향으로 판결문이 수정되기까지 했는데요. 재판부는 “법관 본인의 판단에 따른 판결 및 설시라고 할 것이라 재판권이 침해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행정처 요청이 아니더라도 원래 그렇게 하려 했다’는 판사들 해명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이런 결론은 다른 재판개입 사안에서도 되풀이됩니다. 재판개입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사가 “스스로의 판단과 책임 아래” “자신의 판단과 책임 하에” “자기 생각대로” 판단했다는 거죠.

일선 판사들은 “대법원장 눈치를 보고 판단을 바꿨는지 아닌지는 해당 판사의 양심만 아는 문제 아니냐”며 황당하다는 반응입니다. 사법부 안에서 대법원장이 누리는 ‘제왕적 권력’을 고려하면 현실과 괴리된 판단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판결문만 봐도 대법원장의 인사권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타납니다. 사법행정을 비판하거나 ‘튀는 판결’을 내려 행정처 눈 밖에 난 판사들은 ‘물의야기 법관 보고서’에 이름이 오르고, 대법원장의 ‘체크’ 한 번에 인사 불이익을 당합니다. 이런 인사권 행사도 ‘재량’이라는 이유로 적법 판단을 받았습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11월27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결심 공판에 출석하며 취재진이 질문하자 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수도권 법원의 한 판사는 “대법원장의 막강한 인사권이 판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포괄적 인사권을 가진 대법원장에게까지 기존의 ‘직권이 없어서 남용도 없다’는 법리가 적용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며 “이번 판단은 사법행정권자가 재판에 개입해도 우리는 제어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법농단이 우리 사회에 준 교훈 중 하나는 판사도 인사평정권 앞에서는 ‘을’이라는 사실일 겁니다. 그래서 사법농단 사태 이후 사법행정상의 직무감독과 재판독립의 적절한 관계 설정을 위해 법관들의 인사 제도나 사무분담 제도의 개선이 이뤄졌죠. 하지만 약 7년이 지난 지금 사법농단의 교훈은 빛이 바랬고 ‘양승태 무죄’만 남은 모습입니다. 법관 관료화를 깨기 위해 마련된 법원장 후보 추천제는 이미 폐지 수순이고, 사법행정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법행정자문회의도 지난해 9월 이후 열리지 않고 있습니다.

사법농단 사태가 재발한다면 과연 사법부는 막을 수 있을까요?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사법농단의 반성으로 도입됐던 안전장치 같은 제도들이 슬금슬금 퇴보하고 있다. 사실상 사법행정권 남용이 재발할 우려가 굉장히 커진 것”이라며 “법원행정처도 다시 과거처럼 강화하는 수순을 밟고 있는데, 양 전 대법원장의 무죄 판결과 함께 당시의 문제의식도 사라지는 것 같아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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