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돌아왔다]①30년 잠자던 증시 어떻게 되살아났나
엔저로 주식 싸지고, 수출 경쟁력 높여
혜택늘린 NISA.. 저축에서 투자로 전환
일본 증시가 돌아왔다. 저금리 정책이 증시에 우호적 환경으로 작용한 것이 배경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일본 증시 부활을 모두 설명하긴 어렵다. 투자를 통한 가계소득 증대 정책, 주주를 우대하는 기업거버넌스 개혁으로 자본시장을 바라보는 국민과 외국인투자자의 시선을 확 바꾼 영향도 있다. 약 10년에 걸쳐 이뤄온 과정이다. 일본 증시의 환골탈태를 분석하고, 국내 시장에 주는 시사점을 분석해 봤다. [편집자]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증시가 침울한 분위기인 가운데 일본 증시가 홀로 고공행진을 펼치고 있다. 새해 들어선 버블경제 시절인 1990년 이후 34년 만에 피크를 찍으며 부활의 신호탄을 쐈다.
일본 증시가 오랜만에 탄력을 보이는 배경에는 우선 거시경제(매크로) 요인이 존재한다. 장기적인 마이너스 금리로 엔화 값이 저렴해진 덕분에 가격 매력이 높아졌다. 또한 엔저와 미국의 탄탄한 경기가 맞물리며 일본 수출기업들의 실적에 힘을 실어줬다.
아울러 올해 1월부터 시행된 일본개인저축계좌(NISA) 제도는 개인 투자자 수급을 유인하는 역할을 했다. 비과세 혜택이 대폭 늘어나면서 저축만 하던 일본인들의 관성을 바꿨다는 평가가 나온다.
34년 만에 최고점 찍은 니케이지수
일본거래소그룹(JPX)에 따르면 일본 대표지수 니케이(NIKKEI) 225지수는 지난 1일 기준 3만6011.46으로 장을 마감했다.
작년부터 꾸준히 오름세를 보이던 니케이 지수는 올해 들어서만 8% 상승했다. 지수는 지난 22일 3만6500을 넘어 1990년 2월 이후 34년만에 최고점을 찍었다. 그 다음날인 23일엔 3만7000에 근접했다. 이후 차익실현 매물이 나오며 조정을 받았지만, 여전히 3만5000선을 지키고 있다.
일본의 또 다른 주요 지수인 토픽스(TOPIX)지수도 작년 말 대비 7% 오른 2534.03을 기록하고 있다. 니케이지수가 3만6900선을 터치한 지난달 23일 토픽스지수도 2565선까지 뛰기도 했다.
반면 같은 기간 다른 아시아 증시는 죽을 쒔다. 홍콩 항셍지수는 작년 말 대비 8% 빠졌다. 2023년초 2만2000였던 지수는 연말 1만7000대로 내려앉았다. 새해에도 추가 하락을 거듭하며 1만6000 밑을 맴돌고 있다. 1년 내내 조정을 받은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는 작년 9월 3000선이 붕괴된 후 여전히 2900대에 머물고 있다. 1일 기준 2770.74로 작년 말과 비교해 5% 이상 하락했다.
우리나라 증시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21년 삼천피를 기록한 코스피 지수는 쭉 내리막을 걷고 있다. 작년 말 반짝 반등하며 2600선까지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올해 들어 2400선까지 밀리며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 증시가 전반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갈 곳이 없어진 자금은 일본으로 몰려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례로 중국에 상장된 AMC 노무라 니케이225 ETF는 순자산 가치 대비 10% 이상의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를 두고 "중국을 탈출한 투자자들이 일본으로 몰려가고 있다"며 "중국 증시에서 일본 주식이 인기 자산으로 떠오른 것을 보면 두 증시의 자금 향방이 엇갈렸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JPX가 공개한 투자자별 거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지난달 4~19일의 기간에 외국인은 1조5000억엔 어치를 순매수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따지면 약 13조6000억원에 달하는 액수다. 같은 기간 외국인이 우리나라 주식을 사들인 금액은 1조7000억원에 그쳤다.
엔저에 일본 주식은 '바겐 세일'
일본 증시가 반등할 수 있었던 건, 그간의 저금리 정책이 빛을 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을 필두로 한국, 유럽 등 전세계 중앙은행은 코로나 팬데믹 당시 대규모로 공급한 유동성을 다시 거둬들이는 작업에 집중해왔다. 이들이 2021년부터 기준금리를 줄줄이 인상하는 동안 일본은 혼자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했다. 달러나 유로화의 유동성은 줄어든 반면 엔화 유동성은 계속 불어난 셈이다.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는 크게 벌어졌고, 엔화 가치는 저점을 찍었다. 1달러당 엔화 가치를 가리키는 엔/달러 환율은 작년 초 130엔이었는데 이달 150엔에 육박했다. 엔/달러 환율이 높을수록 엔화 가치가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엔화 약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증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첫 번째 주식이 저렴해지는 효과를 만들었다. 투자자들이 해외 주식을 거래하려면 우선 그 나라의 돈으로 환전해야 한다. 결국 엔화 가치가 저렴해졌다는 건 같은 100달러를 가지고 일본 주식을 이전보다 더 많이 살 수 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엔저는 일본 수출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였다. 우리나라처럼 수출 의존도가 높은 일본 경제는 수출기업들의 실적에 좌우된다. 증시도 마찬가지다. 대표 종목들 역시 대부분 수출 기여도가 높은 제조업이다. JPX에 따르면 12월 말 기준 대형주를 모아둔 프라임지수의 시가총액 비중이 가장 높은 업종은 전자기기(16%)다. 자동차 등 운송기기(10%), IT(9%)가 뒤를 잇는다.
특히 대미 교역량이 많은 일본은 미국 경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연말 연초 미국 성장주의 반등이 일본 대형주 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최보원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 주요 지수 중에서도 니케이 지수는 반도체, 장비, 소재 기업 등 글로벌 IT 기업의 수요 증가로 실적이 개선되는 업체의 비중도 높다"며 "연초 보수적인 컨센서스 발표로 하락했던 미국 성장주가 반등하자 부진했던 일본 반도체·소재 기업 중심으로 반발 매수세가 유입됐다"고 설명했다.
최근 들어 엔화가 강세로 돌아설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일본 중앙은행(BOJ)은 지난달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기로 하면서 주식시장은 당장 엔화가 강세로 전환할 것이란 우려를 덜었다. 김성환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작년 하반기 이후 시장은 완화정책 종료와 엔화 강세 시점을 저울질하고 있지만, BOJ는 물가보다 경기를 더 신경쓰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저축 대신 투자' …개미 자극한 NISA 개편
연초 일본 증시를 끌어올린 건 단지 매크로 요인만이 아니었다. 일본판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인 NISA의 변신도 투자자를 유인하는데 한몫했다.
주식 등에 투자할 때 매각 차익이나 배당금에 대해 20%의 세금을 내야하지만, NISA 계좌를 통해 거래하면 비과세 혜택이 주어진다. 일본 주식은 물론 해외주식, 상장지수펀드(ETF), 리츠, 투자신탁 모두 담을 수 있다.
앞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작년 6월 '새로운 자본주의의 그랜드 디자인 및 실행계획 2023 개정안'을 발표했는데, 가계소득 증대를 목표로한 NISA 세제 개혁이 이 가운데 하나다.
기존 NISA는 적립형과 일반형으로 나눠지며, 투자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사용했다. 그러나 개편된 NISA에서는 종류를 적립형, 성장형으로 새롭게 분류하고 투자자는 두 가지 모두를 혼용해서 쓸 수 있다. 덕분에 비과세 혜택이 대폭 늘어났다. 비과세 적용기간도 무기한으로 연장했다.
일본에서 투자자들은 100주 단위로 매수할 수 있다. 이는 소액 투자가 많은 개인들의 증시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혔다. 이번 NISA의 개혁으로 투자자의 접근이 쉬워졌다는 평가다. JPX에 따르면 도쿄거래소의 지난달 4~19일 개인 매매 거래량은 28조7000억엔으로 작년 1월 한달 거래량(24조7000억원)을 이미 훌쩍 뛰어넘었다.
야마지 히로미 JPX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신년 인사를 통해 "올해는 새로운 NISA 제도가 시작되는 상징적인 해가 될 것"이라며 "소액투자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꾸준히 높아지는 가운데, 올해는 우리의 오랜 염원인 '저축에서 투자로의 전환'이 드디어 본격적인 추진력을 얻는 해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②편에서 계속)
백지현 (jihyun100@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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