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기억하라, 백골이 말하는 비참한 죽음을

노현웅 기자 2024. 2. 2.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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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30년 베테랑 기자가 2023년 4월 사회부 현장으로 복귀한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를 출입하게 된 그는 충남 아산의 한 야산에서 양손을 묶인 채 쪼그려 앉은 모습의 백골 'A4-5'를 만난다.

성재산에서 발굴된 백골 'A4-5', 그의 DNA를 채취하기 위해 허벅다리 뼈를 절단한 'TRC-23-0016', 설화산에서 출토된 은비녀, 임신 9개월 태아인 채로 사살돼 이름조차 없는 맹씨 집안의 아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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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 성재산 발굴 현장에서 삐삐선(군용통신선)에 손이 묶인 채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 발굴된 ‘A4-5’의 모습.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본 헌터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l 한겨레출판 l 2만원

경력 30년 베테랑 기자가 2023년 4월 사회부 현장으로 복귀한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를 출입하게 된 그는 충남 아산의 한 야산에서 양손을 묶인 채 쪼그려 앉은 모습의 백골 ‘A4-5’를 만난다. 진실화해위가 발굴 사업을 진행하고 언론에 성과를 공표하면서 성사된 우연한 조우였다. 이 만남을 계기로 회당 원고지 수십매에 달하는 기사가 6개월간 주 2회 연재되는 불가사의한 기획이 ‘한겨레’에서 진행된다. 책으로 묶여 나온 ‘본 헌터’다.

성재산, 설화산, 새지기…. 책은 충남의 작은 도시 아산의 이름없는 야산들에서 벌어진 한국전쟁 시기 학살 참극을 뼈대로 삼는다. 어디 아산뿐일까. 전국 어느 지방의 야산, 언덕의 이름 뒤에 ‘학살 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광범위하게 진행됐던 한국전쟁 시기 야만의 기억을 두루 아우르며 무려 70여년 시공간을 넘나든다. 이토록 장대한 스케일에 사실성을 더하는 디테일들이 기자 한 사람의 6개월간 취재로 가능하다니, 같은 직업을 가진 이로서 ‘불가사의’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충남 아산시 성재산 발굴 현장에서 발굴된 ‘A4-5’의 유골을 수습한 모습. ‘A4-6’이라는 표기는 ‘A4-5’의 오기이다.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유골 ‘A4-5’와 그 주변인, 그리고 땅속에 몸을 숨긴 이들 뒤를 쫓는 ‘본 헌터’(뼈 사냥꾼)를 두 축으로 이야기들이 교차한다. 산만할 수 있는 이야기 구조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이는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고고미술사학)다. 박 교수는 1968년 공주 석장리 뗀석기 채굴 현장부터 2023년의 성재산 발굴 현장까지 반세기 넘게 땅속에 묻힌 삶의 마지막 흔적을 집요하게 추적해왔다. 그의 이메일 아이디가 바로 본 헌터. 그의 멈추지 않는 탐구욕 덕분에 책은 일제시대 강제징용 피해자부터 세월호 참사까지 온갖 구조화된 폭력과 재난, 그리고 삶과 죽음을 관찰하는 생생한 현장성을 가지게 되었다.

2023년 충남 아산시 성재산 발굴 현장에서 발굴된 한국전쟁 당시 학살 피해자들의 유골.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가장 큰 장점은 장대한 스케일과 의미에 이야기가 압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려 200여명의 실존 인물과 이들 주변의 각종 사물이 화자가 되어 독자에게 이야기를 거는데, 다양한 사료가 바탕이 되어 진실성을 담보하면서도 이야기의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 성재산에서 발굴된 백골 ‘A4-5’, 그의 DNA를 채취하기 위해 허벅다리 뼈를 절단한 ‘TRC-23-0016’, 설화산에서 출토된 은비녀, 임신 9개월 태아인 채로 사살돼 이름조차 없는 맹씨 집안의 아이까지. 각자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설켜 한 시대 지역사를 재구성한 솜씨가 탁월하다.

흔히 목소리 내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을 기자 직업의 소명 가운데 하나로 꼽는데, 지은이는 이 수준을 넘어 억울하게 땅에 묻힌 지 63만 시간이 지난 백골에게 인격과 목소리를 만들어 주었다. 책에서 ‘A4-5’는 이렇게 말했다. “로벤이라는 학자는 빠르고 고통 없는 죽음을 ‘좋은 죽음’,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나쁜 죽음’이라고 말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비참한 죽음이다. 그래서 아직도 떠나지 못한 것이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전쟁 시기 학살, 그 야만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집대성한 책을 통해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2013년)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로부터 10여년 지나 발간된 이 책을, ‘A4-5’의 목소리를, 반드시 읽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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