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한국 소설가들이여, 세계의 젊은 독자를 위해 써라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인터내셔널)을 받고, 정보라의 ‘저주토끼’가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82년생 김지영’이 해외에서 30만부 이상 팔리는 등 케이(K)-문학의 세계화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임스 게일이라는 선교사가 있다. 캐나다 출신의 제임스 게일은 1888년 조선 땅을 밟은 뒤 한국어를 익혀 성서를 우리말로 옮기고 ‘구운몽’과 ‘춘향전’을 영어로 번역해 영미권에 소개했다. 지구 어느 편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는 게일 같은 선교사들의 노력이 있었다.
안선재(82) 번역가는 지금 현역에서 가장 활발히 한국 문학을 세계 시장에 소개하고 있는 수사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에서 중세문학을 전공한 뒤 학업을 더 이어가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가 떼제공동체를 만나 수사의 길을 택했다. 떼제공동체는 개신교와 가톨릭 등 종파를 넘어 신뢰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영적 공동체이며, 수사는 독신으로 사는 남자 수도자를 뜻한다.
처음에는 필리핀으로 건너가 빈민가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우연히 그곳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의 제안으로 1980년 한국에 건너와 활동하면서 서강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서강대에선 강사로 시작해 영문학과 교수로 임용된 뒤 학과장도 두 번 역임하고 2007년에 정년퇴직했다. 1994년에 귀화하면서 당시 번역하던 고은의 ‘화엄경’에서 영감을 얻어 ‘안선재’라는 이름도 얻었다.
“어렸을 적 외동아들이라서 형제도 없고 마을에 또래 친구도 없어서 혼자 책만 읽으며 자랐지요. 워낙 내성적이라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을 못했는데, 한국에서는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학생들을 가르쳤죠.”
지금은 서강대 옆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매일 출퇴근하면서 번역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가 처음 번역한 작품은 구상의 시였다. “학생들에게 영시를 가르치다 보니 한국 시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어요. 동료 교수에게 한국 시를 좀 소개해달라고 하니까 구상의 시를 알려줬지요. 시가 영적이고 간결하더라고요. 동료 교수의 소개로 구상 시인을 직접 만나기도 하고 시집도 받게 되면서 번역을 하게 됐어요. 구상 시를 번역하니까 주변에서 서정주, 김광규, 고은 등 다른 시도 있다면서 줄줄이 소개를 받았지요.”
번역한 한국 시를 영국과 미국에서 출간했다. 이메일도 없던 시대라 직접 편지를 써서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 “외국 사람들에게도 한국 시를 접하게 하고 싶었지요.”
김수영, 도종환, 정호승, 안도현, 신경림 등 지금까지 57권의 시집을 번역했고,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송경동의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출간도 앞두고 있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이금이의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임성순의 ‘컨설턴트’ 등 소설도 10여권 번역했다. 그는 “소설 번역보다 시 번역이 더 재밌다”고 말했다. “더 짧으니까!”라며 찡긋 웃었다. 가장 힘들었던 작품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과 고은의 ‘화엄경’이었고, 가장 잘했다고 자부하는 작품은 신경림의 ‘농무’다.
약 35년간 번역에의 헌신은 대한민국문학상 번역상, 대산문학상 번역상, 옥관문화훈장, 대영제국훈장 등의 줄이은 수상으로 화답받았다. 하지만 그는 “한국인들은 노벨상, 금메달 좋아하는데 상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번역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인연”이라고 명쾌하게 말했다. 우연히 소개받아 연결되고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가 번역한 작품 중에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은 천상병의 시선집이다. 25쇄나 찍었다. “영어와 한국어가 병기된 시집이었는데, 한국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읽히려고 많이 산 거 같다”고 웃었다.
번역의 동력에 대해서 “아마 제임스 게일도 그랬을 텐데, 강박적으로 빠져서 멈출 수가 없어서 하는 것”이라며 “번역하기 위해 번역한다”고 말했다.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요즘은 18∼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건너와 기록했던 한국의 초창기 가톨릭 역사를 영어로 옮기고 있다.
지난 1월3일은 그의 생일이었다. “정호승 시인과 생일이 같아요. 출생연도는 다르지만. 인사동에서 같이 생일잔치를 했지요. 이금이, 장사익 등 여러 사람이 와서 축하해줬어요. 너무 좋았어요.”
수사의 일이라는 게 인간의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를 연결하는 일이라면, 번역가의 일이란 이쪽 문화와 저쪽 문화를 연결하는 일이다. 그는 더 많은 연결을 위해 한국의 소설가들에게 당부한다. “오늘날의 소설은 즐길 거리가 되어야 하고 세계의 젊은 독자들의 요구에 맞춰야 합니다. 한국 독자만을 위해 쓰는 한국 작가에게는 번역가가 필요 없습니다. 내일의 세계를 위해 쓰는 작가들이 우선순위에 있습니다.”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THE POET
이문열의 소설 ‘시인’의 영문판이다. 19세기 실재 인물이자 전설적인 시인 김병연(김삿갓)의 생애를 소설화한 것으로 이문열의 ‘위장된 자서전’으로 읽히기도 한다. “조선시대 이야기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아름답게 쓰여졌으며 영국 독자들의 반응도 좋았다”고 안 번역가는 추천했다.
이문열, 하빌프레스(1994)
BACK TO HEAVEN
천상병 시인의 시선집 ‘귀천’의 영문판이다. “천상병 시인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가 죽은 뒤 부인 목순옥이 운영하는 인사동 찻집 ‘귀천’을 자주 방문했다”는 안 번역가는 목순옥의 에세이 ‘나의 남편 시인’(MY HUSBAND THE POET)을 영문판으로 펴내기도 했다.
천상병, 코넬(1996)
A LETTER NOT SENT
‘부치지 않은 편지’라는 제목의 정호승 시선집으로, 시인이 직접 선별한 108편의 한글 시와 안선재 번역가가 번역한 영문 시가 나란히 실린 영한대역본이다. 정호승 시인의 유명한 작품 ‘슬픔이 기쁨에게’ ‘술 한잔’ ‘내가 사랑하는 사람’ 등이 실려 있다.
정호승, 서울셀렉션(2016)
CONCEALED WORDS
지난 2000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뒤 활발히 작품활동을 펼치며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노작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백석문학상 등을 두루 수상한 신용목 시인의 시선집 ‘숨겨둔 말’이다. 안 번역가가 “인간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귀띔했다.
신용목, 블랙오션(2022)
글·사진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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