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밥걱정 밥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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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할머니가 대부분인 요양원의 간호사가 할머니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을 소개했다.
치매에 걸려서도 자나 깨나 '밥걱정'을 하는 것이 우리 엄마, 우리 아내, 이제는 우리 할머니들이다.
그런데 치매에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강박이 밥걱정이라니.
나는 치매에 걸리지 않더라도 늙어서 밥걱정 때문에 병원에서도 짐을 꾸리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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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할머니가 대부분인 요양원의 간호사가 할머니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을 소개했다.
“할머니들은 대체로 초저녁에 잠이 드셨다가 밤중에 깨서 갑자기 짐 보따리를 싸세요. 기저귀건 양말이건 보따리에 아주 반듯하고 정갈하게 싸서 짐을 꾸리며 ‘집에 갈 거야’라고 말씀하세요.”
그런데 이 치매 할머니들이 집에 가려는 이유는 가족이 그리워서가 아니다. 이유를 물으면 “남편이랑 아이들에게 밥을 지어줘야 해”라고 하신단다. 치매에 걸려서도 자나 깨나 ‘밥걱정’을 하는 것이 우리 엄마, 우리 아내, 이제는 우리 할머니들이다.
밥은 사람의 생명줄이고 밥을 짓는 것은 숭고하고 존엄하다. 하지만 인생에서 기쁨과 슬픔·행복과 고통이 희미해지고 가족의 이름과 얼굴, 심지어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리는 치매 상태에서 왜 ‘밥걱정’은 징글징글하게 떠나지 않는 것일까.
나도 엄마를 떠올리면 엄마가 전해준 값진 교훈보다 지어주던 밥, 혹은 직접 만들던 각종 음식이 만화영화의 한장면처럼 둥실둥실 떠다닌다. 비 오는 날 빗소리처럼 들리던 기름소리에 프라이팬에서 부쳐지던 김치전, 밀가루와 달걀을 섞은 반죽을 뜨거워진 기름 속에 퐁당 집어넣으면 노르스름한 공처럼 위로 떠오르던 도넛, 온갖 남은 반찬을 모아 고추장·참기름에 비벼 먹던 비빔밥…. 그런데 아버지와 관련해 떠오르는 음식은 거의 기억에 없다.
따뜻하고 소중한 밥의 기억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지만 엄마가 우리에게 매끼를 정성껏 해 먹이려고 어떤 노력으로 제철 재료를 챙기고 양념 배합을 연구했는지, 무엇보다 가계부를 얼마나 꼼꼼히 살펴야 했는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밥을 짓는 것이 어머니들의 의무이자 보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치매에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강박이 밥걱정이라니.
조정래 선생은 200자 원고지 1만5700매 분량의 소설 ‘태백산맥’을 쓰는 과정을 “글감옥에 갇혀 살았다”라고 표현했다. 덕분에 우리는 감동적인 작품을 만나는 행복을 누렸다. 우리 어머니들도 평생 ‘밥감옥’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글감옥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조 선생에게 주었지만, 밥감옥은 ‘짜다’ ‘싱겁다’ 등 투정이나 ‘아무개 마누라는 장금이처럼 솜씨가 좋더라’ ‘우리도 풀 말고 고기 좀 먹자’ 등 요구사항만 엄마에게 던져졌다.
관광지 식당에서 여고 동창끼리 여행왔다는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소녀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고 까르륵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 식당 음식이 맛있냐”고 묻자 “남이 해준 밥은 다 맛있다”고 답했다.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내가 만든 음식을 가족이 맛있게 먹어주면 뿌듯하다. 그러나 그 뿌듯함과 책임과 의무를 남편에게도 공평하게 나눠주고 싶다. 음식 배달앱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고를 권리도 기꺼이 부여하겠다.
나는 치매에 걸리지 않더라도 늙어서 밥걱정 때문에 병원에서도 짐을 꾸리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나 혼자 부엌에서 외롭게 밥을 짓는 기억보다 가족과 함께 나눈 대화, 손잡고 걸었던 골목, 나눠 읽던 책들로 가슴을 채우며 나이 들고 싶다.
유인경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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