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책방과 마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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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 내 집필실 동편을 차지한 지도 4년이 지났다.
지리산을 동편으로 바라보듯이 섬진강도 동편에 두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날들이다.
올해부터는 하동책방을 핑계 삼아 섬진강을 더 많이 오갈 작정이다.
호방한 지리산과 그윽한 섬진강으로부터, 습관처럼 선 자리와 새롭게 갈 길을 확인하는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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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의 독자 만나려 떠난 여정
말씨 달라도 삶의 풍경 닮았고
익숙한 방향 뒤바뀌니 새롭네
책방을 역참 삼아 봄여행 가자
틀 깨고 새롭게 갈길 보일테니
지리산이 내 집필실 동편을 차지한 지도 4년이 지났다. 동트는 새벽에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섬진강이 흐르고 그 너머 천마산이 있다. 천마산 위로 이마처럼 튀어나온 산이 바로 지리산이다.
지리산으로 저녁놀이 번지는 마을에 모처럼 갈 기회가 생겼다. 경남 산청에 있는 산아책방에서 독자와의 대화를 갖기로 한 것이다. 전남 곡성에서 산청으로 가는 방법은 두가지다. 전북 남원과 경남 함양을 통하는 윗길과 전남 구례와 경남 하동을 지나는 아랫길이 있다. 윗길이 아랫길보다 가는 데 한시간 덜 걸리지만, 나는 언제나 아랫길을 고른다. 섬진강을 굽이굽이 따르기 위해서다. 곡성에 살면서부터 생긴 마음이다. 지리산으로 갈 때 이왕이면 섬진강을 아우르고, 섬진강을 오갈 때 가능한 한 지리산 가까이 붙으려는 마음!
지리산 동편과 서편은 사투리부터 확연히 다르지만, 지리산을 이웃한 마을의 모습과 삶의 풍경엔 공통점도 적지 않다. 지리산 반대편에서 온 작가를 위해 특산물인 곶감과 직접 만든 빵을 선물로 건넬 만큼 인심도 좋다. 주경야독하며 독서 모임을 이어온 독자들의 눈망울 역시 매우 닮았다.
산청에서 하룻밤을 머문 후 하동으로 넘어갔다. 대하소설 ‘토지’의 등장 공간이기도 한 악양면에 하동책방이 문을 여는 날이다. 곡성으로 집필실을 옮긴 후 남원이나 구례 그리고 전남 순천에는 자주 갔지만, 하동으로 건너간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소설 답사를 위해 화개면까지만 갔고 악양면으로 내려가진 않았다. 지리산을 동편으로 바라보듯이 섬진강도 동편에 두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날들이다. 틀을 깨지 않으면 눈에 익은 길을 따라 익숙한 방향으로만 뜻을 키우기 쉽다.
책방을 여는 자리에 참석해 축사를 보탰다. 섬진강은 곡성을 지나 구례와 하동을 거쳐 전남 광양으로 흐르고, 봄꽃들은 광양에서 하동과 구례를 거쳐 곡성에 다다른다고. 서편이냐 동편이냐 전라도인가 경상도인가를 따지지 말고, 한 강물에 발을 넣으며, 매화·산수유· 벚꽃에 취해 살아온 이웃끼리 책방을 역참처럼 두고 자주 만나 어울리자고.
축사를 마치고 모임이 끝난 뒤 나눴어야 할 말들이 뒤늦게 더 떠올랐다. 강물의 범람을 막는 둑은 강을 따라 나란히 두개일 수밖에 없는데, 내가 선 강둑에 핀 꽃과 건너편 강둑에 핀 꽃이 다르지 않다고. 강의 좌측을 따라 헤엄치는 은어와 우측을 따라 헤엄치는 은어 또한 같은 종(種)이라고.
하동책방에서 책을 골라 샀다. 동네 책방의 특성과 책방지기가 누구냐에 따라 들여놓는 책이 달라진다. 곡성이나 산청에는 없는 책이 하동에는 있고, 하동이나 구례에는 없는 책이 곡성에는 있는 식이다. 책방지기의 취향과 고민을 깨닫는 즐거움이 제법 크다.
강을 거슬러 봄꽃이 필 방향을 따라 곡성으로 돌아왔다. 올해부터는 하동책방을 핑계 삼아 섬진강을 더 많이 오갈 작정이다. 기대를 하나 더하자면 광양에도 마을활동의 거점이 되는 동네 책방이 생겨 그곳까지 책을 찾는 발걸음이 넘실거렸으면 좋겠다.
하동책방이 문을 열며 내건 문장을 곱씹는다. “불 꺼진 지리산 자락에 지혜의 등불이 되고 싶습니다.” 지혜의 등불은 하동은 물론이고, 지리산 동서남북을 각각 차지한 남원과 함양과 산청과 구례 그리고 곡성에서도 빛나야 한다. 또한 깨달음의 배에도 등불을 실어 강물이 전북 진안과 임실과 순창으로 흘러 드넓은 바다에 닿을 때까지 같이 움직일 필요가 있다.
입춘이 코앞이다. 올봄 여행을 책방에서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호방한 지리산과 그윽한 섬진강으로부터, 습관처럼 선 자리와 새롭게 갈 길을 확인하는 기회이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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