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처가 재판 전개 '작전'까지 짰는데... 직권의 '남용'이 아니다?
피고 변호사 만나고 시나리오도 작성
"사법부에 미칠 영향 점검하는 차원"
남용 인정돼도 주체는 '실무자' 불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이른바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는 혐의 대부분에 대해 '직무상 권한'(직권)이 없다고 판단했고, 일부는 직권의 행사는 맞지만 '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원래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 구성요건 자체가 모호하거나 추상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재판부가 전직 대법원 수뇌부인 피고인들의 의도를 최대한 '선해'하는 방향으로 해석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려운 대목이 여러 군데에서 보인다.
일본기업 측 대리인 김앤장을 만났는데도...
재판부의 이런 선한 해석이 고스란히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은 법원행정처의 강제징용 소송 개입 혐의 부분이다. 2012년 대법원 소부 선고를 통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승소했다. 이 판단이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하는 당시 박근혜 정부 청와대 및 외교부의 입장을 반영해 소부 판결을 뒤집으려면, 판례 변경을 전제로 한 전원합의체 회부가 필요했다. 검찰은 이런 상황에서 행정처가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을 계기로 삼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도록 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이 일본 기업을 대리한 김앤장 변호사, 외교부 관계자들과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을 협의한 사실은 인정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를 배제한 부적절한 접촉이다. 또 행정처는 이 과정에서 일방 의견만을 반영한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이를 지시한 임 전 차장의 행위가 직권에 해당하지만 남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중 '독일의 기억, 책임, 미래 재단 검토' 보고서엔 다섯 가지 관련 시나리오가 제시됐는데, 이 중 2012년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지 않도록 처리 지연을 전제로 하는 안도 포함됐다. 검찰은 재상고 사건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한 것으로 봤지만, 재판부는 "(당시) 행정처 기획조정실장으로서 사법부에 미칠 영향 및 파급 효과 등을 미리 점검해 보기 위한 차원에 불과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가 이렇게 판단한 건 사법행정권자의 직무권한을 "재판사무의 감독, 더 나아가 재판부와 소통하는 등 재판 영역에 대해 폭넓게 행사될 수 있다"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재판 개입 아닌 설득" 판단
재판 진행을 위한 '작전'까지 짰는데도, 재판에 개입할 의도가 없다고 본 점에선 의문이 남는다. 2015년 '상고법원 관련 BH(청와대) 대응전략' 보고서를 살펴보면, "주일본대사 경력 이병기(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최대 관심사는 한일 우호관계 복원이니 재상고 사건에 대해 원론적 차원에서 법원의 협조 노력 또는 공감 의사를 피력한다"고 적혔다.
검찰은 이 보고서가 당시 양승태 사법부의 숙원 사업이던 상고법원 설치에 대한 협조를 얻기 위해 당시 청와대가 원하는 재판 결과를 도출해 내려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봤다. 상고법원 반대론자인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대신, 이병기 전 실장으로 설득 대상을 변경한 것도 우회 전략의 일부다. 세운 전략이 실제 실행된 것인데도, 재판부는 직권남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입법 협조를 얻기 위한 새 전략 마련 및 구체적 설득방안을 수립·검토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수도권의 한 판사는 "재판부 논리에 따르면 행정처에서 참고자료 등을 만들어 외교부와 협의한 내용 등은 괜찮다는 건데, 그 논리가 정말로 괜찮은지 따져 봐야 한다"며 "이게 반복이 된다면 재판 독립이 침해될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남용' 인정돼도 주체는 실무자
재판부는 일부 혐의에 대해 직권 존재에 이어 남용까지 인정했지만, 그 책임 대상은 대법원 수뇌부가 아닌 실무자로 한정했다.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를 위해 대응방안 검토를 지시한 혐의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재판부는 "법관의 표현의 자유와 연구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위법한 내용의 대응방안을 검토하도록 했다"고 판단했다. '서기호 전 국회의원의 판사 시절 재임용 탈락 사건'과 관련해 임 전 차장이 신속 종결 의견을 당시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를 통해 재판부에 전한 부분 역시 직권남용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들 혐의 모두 실무자에게만 책임을 지우고, '윗선'인 양 전 대법원장 등의 공모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논평을 통해 "'사법농단'이 실재했음에도 형식적 법리해석과 적용으로 양 전 대법원장의 범죄 성립을 인정 안 한 1심 법원 판단은 구체적 정의에 반하는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이근아 기자 galee@hankookilbo.com
박준규 기자 ssangkka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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