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82> 파우스트-괴테(1749~1832)
- 나약한 지식인이었던 파우스트
- 악마 꾀임에 넘어가 피의 계약
- 움직이는 욕망덩어리로 타락해
- 사랑한 이 잃는 등 비극과 마주
- 종교·이성 갈등 다양한 소재로
- 남녀차별 등 시대적 문제 지적
- 욕망 충실한 근대 인간상 성찰
중세 유럽 민간 전설에 파우스트란 마법사 혹은 연금술사가 나온다. 그는 악마에게 자신 영혼을 팔아 자연과 세계가 움직이는 비밀을 캐려다가 단죄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중세 말 기독교 권위가 사위고 인간을 탐구하는 근대가 밝았다. 이제 파우스트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간상.

▮파우스트를 불러낸 괴테
이런 조류가 흘러 문학에 닿았다. 영국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1564~1593). 희곡 ‘파우스트 박사의 비극적 이야기’를 썼다. 이를 읽은 추밀원이 이단 혐의로 소환장을 건넸다. 그곳으로 불려 가기 전 말로는 술집에서 취객 칼에 찔려 숨을 거뒀다. 희곡이 몰고 온 신성 모독 논란이 이 죽음과 무관찮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근대로 뛰어들려던 파우스트도 멈춰 섰다.

파우스트를 다시 불러낸 문호가 괴테다. 24세 청년이었던 그는 1773년 2부작 희곡 ‘파우스트’를 쓰기 시작해 1808년 1부를 끝냈다. 숨지기 1년 전인 1831년 2부 마지막인 1만2111행에 온점을 찍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가도다.’ 1행 ‘너희들 다시 다가오는구나’를 쓴 지 58년 만이었다.
괴테가 창조한 파우스트는 민간 전설에 나올 때와는 다르다. “난 대학자랍시고 평생 책을 들입다 팠지만, 건진 건 아무것도 없구나. 실패한 인생, 끝장내자.” 진정 원하는 건 몸과 마음이 부딪쳐 충격음을 내는 삶이다. 아쉽게도 스스로 그 격랑 속으로 뛰어들 재간이 없는 파우스트. 독배를 마셔 생을 접으려는 순간, “댕그랑~뎅그렁~” 하는 부활절 전야 종소리와 우아한 천사 합창을 듣는다. 파우스트는 정신을 차리고 살아갈 의지를 벼른다.
그는 나약한 지식인이었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꾄다. “박사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겠소. 그 대신 당신이 죽으면 영혼을 내게 넘겨야 하오.” 파우스트는 자기 피 한 방울을 인주 삼아 메피스토가 내민 ‘사후 혼령 인도 계약서’에 지장을 꾹~. 파우스트는 살아 움직이는 욕망덩어리로 변한다. 모든 걸 팔아치워 욕망을 채우려는 근대 인간상이 어른거린다.
메피스토는 내기에 미쳤다. 이미 하느님과도 일을 벌였다. 1부 ‘천상의 서곡’장(章). 메피스토는 하느님에 매인 하인이다. 구약성서에서 그랬듯. 하느님이 안 들을 땐 ‘영감’이라 부른다. 그는 자신이 파우스트 박사를 타락시킬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하느님은 어림없다는 말씀. “인간은 노력하는 동안엔 방황하는 법이지. 착한 인간은 어두운 욕망 가운데에서도 올바른 길을 잘 알고 있단다.” 메피스토는 “그럼, 저와 내기하시죠. 파우스트가 그렇게 될지 안 될지”라며 내기를 걸어 성사된 거다.

하느님과 얘기가 다 됐겠다, 거침없는 메피스토다. 파우스트를 관능 속에 밀어 넣는다. 그 전에 젊어지기가 필수. 늙수그레한 파우스트는 마녀가 만든 회춘 탕약을 들이켠다. 그는 30년 전 팔팔한 장년 사내로 돌아갔다. 여자 치마만 봐도 발정하는 마약을 마신 그는 순진무구하면서도 예쁜 평민 처녀 그레트헨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메피스토를 들들 볶아 욕정을 푼 파우스트, 자신이 몰고 온 엄청난 비극과 맞닥뜨린다. “욕망 충족에는 희생이 따른다.” 들려오는 괴테 목소리.
파우스트는 ‘타르튀프’(몰리에르 작) 속 ‘동 쥐앙’처럼 파렴치한은 아니었다. 후회와 참회로 고통스럽다. 파우스트 밀애에 그레트헨 어머니는 눈엣가시다. 잠재우려고 수면제를 먹였는데 양이 너무 많아 어머니는 영영 눈을 못 떴다. 그레트헨은 파우스트 아기를 낳아 물에 빠트려 죽인다. 그 죄로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진다. 그녀 오빠는 가문을 더럽힌 파우스트와 결투를 벌이다 그가 내민 칼에 찔려 절명한다.
파우스트-그레트헨 사랑은 당대 사건에 원형을 둔다. 1772년 1월 14일 수잔나 마르가레타 브란트란 여성은 혼전에 낳은 영아를 살해한 죄로 사형됐다. 변호사였던 괴테는 이 사건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1부 ‘거리’장에 등장하는 ‘마르가르테’가 그레트헨. 괴테가 이 사건을 인용한 저의를 짐작하긴 어렵잖다. 비극으로 끝난 파우스트(귀족)와 그레트헨(평민) 간 사랑은 혼외 남녀 연애를 금기시하는 18세기 이전 도덕규범에 대한 야유다. 괴테는 욕망에 충실한 인간상을 들여다본다. 아울러 당대에 만연했던 신분·남녀 차별 문제를 꼬집었다. 저자는 200여 년 후에도 이 같은 문제가 여전하다는 걸 내다본 걸까. 괴테는 이 고전 속에 대안을 내놓았다. 그레트헨이 보인 순수한 사랑, 생명과 맞바꾼 희생에 대한 대가다. 2부 마지막 대목이다. 그녀 영혼은 성녀가 돼 파우스트 혼백과 함께 하늘나라에 든다. 두 남녀를 기다리는 건 지존한 영생.
▮다양한 소재로 성찰을 구하다

‘파우스트’는 다양한 소재로 성찰을 구한다. 우선, 중세 기독교 도그마와 인본주의 간 싸움. 이성과 감성 간 투쟁도 눈길을 끈다. 무엇이든 부정하는 허무주의자 메피스토는 냉소를 날린다. “인간은 천상의 빛이란 이성을 더 동물처럼 되려고 사용하잖아. 너흰 결국 동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이에 답하는 파우스트 목소리가 2부 4막 ‘험준한 산악지대’장에서 우렁차다. “네놈이 제대로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인간의 갈망이 무엇인지 너 따위가 알겠느냐?/자네처럼 심술궂고 가혹하고 냉정한 자가/인간이 무엇을 꼭 필요로 하는지 알기나 하겠는가?”
1부에서 파우스트는 개인으로 모든 삶을 체험하려는 욕구를 가진 인간이다. 2부에서는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불거지는 모순을 까발리는 공인 파우스트로 변모한다. 그는 궁정 유명 인사가 돼 화폐를 발행해 파산 직전인 왕국을 살려낸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총사령관이 돼 나라를 지켜내기도 한다. 이런 공을 세운 그에게 국왕은 해안가 봉토를 내린다. 파우스트는 그곳을 간척해 시민이 안락하게 지낼 공동체 거주지를 조성하려 서둔다. 하지만 간척 공사가 시작되면서 살육과 화재가 잇따른다. 주민을 위한 사업이 오히려 희생을 불렀다. 근대 자본주의가 휘두르는 폭력을 괴테는 이 같은 알레고리로 꼬집었다. 괴테는 물신주의 극복을 필생 과업으로 삼았다.
2부는 중세에서 고대 그리스 시대로, 지상에서 천상과 지옥으로 오가는 여행기다. 괴테는 중세를 근대로 넘긴 유럽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비춘다. 그리스가 벌인 대(對)터키 해방전쟁(1821~1829년)을 부각하고, 유럽은 하나가 돼야 한다는 통합론이 그것.
파우스트는 고대 그리스로 날아가 지상 최대 미인이라는 헬레네를 만난다. 제자 바그너가 탄생시킨 시험관 속 아기인 호문쿨루스, 메피스토와 함께. 거기서 파우스트는 헬레네와 살면서 아이(오이포리온)를 낳고 행복하게 지낸다. 하지만 헬레네는 애초 약속대로 지옥으로 돌아가고, 파우스트는 구름 마차를 타고 독일로 돌아온다. (‘험준한 산악지대’장)
대단원은 고전극 냄새가 물씬 난다. 어원상 빛을 싫어하는 자, 선(善)을 파괴하는 자인 메피스토까지 참회하니까. 악마를 상징하는 수탉 깃털과 말발굽이 달린 한쪽 다리를 심하게 떨면서. 구원받는 건 눈이 멀어 죽은 파우스트뿐만이 아니다. 그를 이끈 이가 그레트헨 영혼이란 점을 주목해야 한다. 위대한 여성성을 괴테 문학이 보여준다.

이 고전은 인간이 맞이할 비극을 따뜻하게 경고한다. 1, 2부 부제가 모두 ‘비극’인 이유. 모순이 삶을 이루는 요소이기에 비극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선한 마음이 길을 찾는다”는 말은 인간이 자신을 향상하려는 존재임을 잊지 않고 노력한다면 구원받는다는 뜻이다. 그 믿음은 값지다. ‘파우스트’는 그 가능성을 찬란히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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