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도살장을 닮은 정치판
어릴 적 명절 이틀 전이면 동네 사람들이 모인 마당에서 돼지를 잡았다. 기술은 없고 힘만 넘치는 장사들 두어 명이 도끼나 큰 망치를 잡았다. 영문도 모른 채 뒤뚱거리며 우리에서 마당으로 나온 돼지는 꽥꽥거리며 젊은 장사들의 도끼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녔다. 관중은 흥분했고 이곳저곳에서 훈수들이 튀어나왔다. “목을 쳐!” “이마 쪽을 쳐!” “아녀, 등을 치라니께?” 등등. 무수히 얻어맞던 돼지는 결국 가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지고 큰 칼이 멱을 뚫으면 선지가 분출했다. 그리고 그 첫 그릇은 동네 좌장에게 건네졌다.
가끔 참석하는 모임에서 이른바 ‘정치 이야기’ 때문에 큰 싸움을 벌인 적이 있다. 그 후론 정치 이야기 하는 사람은 퇴출하기로 무언의 합의를 보았다. 모임의 ‘탈정치화’가 시작된 것. 정치가 뭐길래, 소꿉친구들의 모임에서까지 문제를 일으킨단 말인가.
우리는 ‘정치인들과 그들의 행태에 관한 모든 것’을 정치의 전부로 알아왔고, 지금도 그렇다. 담론이랄 것도 없는 무잡(蕪雜)한 말들의 핵심에는 정치인들이 있고, 그들은 ‘죽일 놈과 살릴 놈’으로 나뉜다. 목소리 크고 주먹 강한 사람들에 의해 ‘죽일 놈’으로 지목된 정치인은 명절의 ‘죄 없는 돼지’처럼 이곳저곳 무자비하게 얻어맞는다. 그러면 흥분한 구경꾼들은 물색도 모르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니, 그곳에 ‘담론의 체계’가 있을 리 없다. 그 말들이 성능 좋은 확성기로 열린 공간에 뿌려질 때마다 동네 구경꾼들은 눈을 부릅뜨고 몰려드는 것 아닌가.
도살장의 돼지는 고통 없도록 다루어야 할 고귀한 생명체도, 그의 고기와 피로 우리를 살찌워줄 고마운 존재도 아니다. 그저 ‘살육의 대상’일 뿐. 그가 나와 가까운 존재인가, 아니면 내 공동체의 힘 있는 나팔수가 시키는 대로 죽여야 할 대상인가가 빗나간 정치인들의 관심사일 뿐이다. 나동그라지는 그의 시신을 보면서 그의 가슴과 머리에 무슨 생각과 열정이 있었는지 보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까닭 모르게’ 미운 정치인을 도살장에 몰아넣고 휘두르는 증오와 폭력을 정치 행위의 핵심으로 알고 있는 것이 동네 도살장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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