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바보상자와 평등한 지성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2024. 2. 2.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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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멍하니 TV 수상기를 들여다보는 모습이 한심해 보였던 것 같다. TV 브라운관이든 영화관의 스크린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화면을 같이 '들여다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뭘 저렇게 보고 있나 싶지만 가만히 보면 화면은 멈춰 있지 않다. 고유한 시간을 가진 세계가 있고 그 속에서 이야기가 흐른다. 사진과 영화는 카메라라는 기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비슷한 것 같지만 가장 다른 점이 거기 있다.

영화엔 두 종류의 프레임이 공존한다. 카메라가 고정한 프레임에 스스로 흘러가는 연속된 프레임이 담겨 있다. 그 흐름에 눈길을 빼앗기면 프레임 밖의 현실에선 아무것도 안 하고 볼거리에만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 상자(TV)를 바보 만드는 상자라 했을 것이다. 물론 그 안의 흐름을 콕 찍어 비판한 사람도 있다. 영화는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스스로 멈춰 사색에 빠질 수 없다고. 보기와 흘러가기 둘 다 생각하는 능력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졌다.

전통적인 고급문화와 구별되는 대중문화가 학문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960년 즈음부터 시작된 문화연구 덕분이다. 1980~90년대로 가면 그 태도가 조금 달라지긴 하지만 문화연구 내에서도 TV와 영화산업이 리드하는 매스미디어(대중매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그런데 반세기도 넘어 이제야 시각적 쾌락에 대한 비판이 사람들에게 통하게 된 것일까. 요즘 TV 없는 거실이 트렌드가 되고 TV가 아예 없는 집도 많다. 영화관도 한산해진 것 같고 말이다.

바보상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영상산업은 오히려 더 성장했다.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넷플릭스와 같은 OTT(Over The Top) 플랫폼이 다양해져 우리는 그들을 통해 더욱 쉽게 더 많은 형태의 영화를 찾아서 본다. 참고로 OTT란 예전의 TV처럼 하나의 셋톱박스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인터넷만 연결돼 있다면 자유롭게 영상을 끌어다 볼 수 있는 체계를 뜻한다. 즉 데스크톱 컴퓨터, 스마트폰, 그외 태블릿과 같은 모바일 기기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스템을 가리키는데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런 OTT 덕분에 훨씬 자주, 다양한 장소에서 더 다양한 형태로 TV와 영화를 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은 더 작고 이동 가능한 화면들로 시선을 돌리기 때문에 거실에서 TV를 치워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연속해서 움직이는 화면이라는 것은 너무나 매력적이라 쉽게 내치기 어렵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와 꼭 같기 때문이다. 세상은 결코 정적(靜的)이지 않으며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시간의 축 위에서 끊임없이 흘러간다. 이 중요한 삶의 일면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창조하고 재구성한 이야기가 수많은 프레임 안에서 우리의 시선을 기다린다.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책'이 수많은 문학의 장르를 아우르고 내용이나 형식의 구분을 넘어 활자화한 콘텐츠 전반을 지시하듯이 이제 '영화'는 연속의 형태로 유통되는 영상콘텐츠를 대표한다. 조각조각 숏폼이 된 영화는 첨단 인터넷과 연결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우리의 수많은 짬 시간 속에 스며들어가고 있다.

요즈음 K컬처로 불리며 한국 대중문화의 국제적 위상이 치솟고 있는데 SNS를 통해 빠르게 회전되는 한국드라마의 역할도 적지 않다. 영상을 이해하는 문해력은 언어의 문해력보다 진입장벽이 낮아 글로벌한 플랫폼에 적합한 것이다.

우리의 눈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 부지런하다. 몸은 가만히 있어도 눈은 쉬지 않는다. 시선은 우리의 관심에 따라 움직이며 세상을 흐름으로 정리하는데 이게 바로 직관의 힘이다. 교육 정도나 지능(IQ)과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타고난 이 능력이야말로 소중한 지성이다.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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