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김대중을 기억한다

임대근 한국외대 인제니움칼리지 교수 2024. 2. 2.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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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근 교수

고백하건대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상투적 물음에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여러 형식으로 윤색된 위인들의 삶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과는 어쩐지 동떨어진 것만 같았다. 마음을 다해 본받고 싶은 삶을 선뜻 꺼내지 못하고 얼버무렸던 까닭이다.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20세기를 갈무리하고 21세기를 맞이한 대통령이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라는 직위로 그를 기억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를 설명하고 표현하는 말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정치인이자 사상가다. 그는 평생 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에 헌신한 사람이다. 그는 독서인이자 웅변가다. 그는 장애인이다. 약관에 정치를 시작한 그는 청년정신으로 세상을 읽고, 세상을 향해 외치며, 세상을 떠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이 돼 헌정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민주, 평화, 인권, 화해는 김대중 사상의 중요한 가치다.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일갈은 이런 가치를 실천해야 한다는 외침이다. '양심'은 그가 추구한 가치를 한 마디로 나타낸 말이다. 그러나 양심을 마음 속에만 가둬두면 온전할 수 없다. 양심은 언제나 '행동'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의 행동은 정치, 투쟁, 운동, 정책으로 완성됐다.

김대중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 중이다. 기념식이 열리고 '사상가 김대중'이라는 책이 출판되고 '길 위에 김대중'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 김대중의 정체성은 다발로 묶여 있다. 한두 가지 측면만 부각해 편파적으로 해석해선 곤란하다. 현실정치의 둘레로만 옭아매도 안 된다.

그럼에도 꼭 기억해야 할 몇 가지는 강조하고 싶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단군 이래 최대 국난'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를 국민과 함께 이겨냈다. 위기극복을 위해 21세기의 비전을 제시했다. 정보통신과 대중문화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초고속 인터넷 강국을 만들기 위해 '정보고속도로'를 깔았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대중문화를 전격 개방했다. 1998년부터 4차례에 걸쳐 이뤄진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라는 자극은 결과적으로 한류의 경쟁력을 키워줬다.

인터넷과 대중문화의 융합은 한류가 성장하는 토대가 됐다. 김대중정부가 처음 표방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방침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대중문화의 제재와 표현에 간섭하지 않은 결과 금기로만 여긴 북한 관련 영화가 속속 등장했다. '쉬리'(1999년)를 필두로 '공동경비구역JSA'(2000년) '실미도'(2003년) '태극기 휘날리며'(2004년) '웰컴 투 동막골'(2005년) 등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했다.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김대중의 신념과도 상통한 성과였다. 이 중 몇은 '1000만 영화'로 기록되면서 영화산업의 파이를 키웠고 한류를 대표하는 콘텐츠가 돼 문화적 자긍심을 드높였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현 한국콘텐츠진흥원) 설립(2001년)은 문화정책의 절정이다. 음악, 영화, 만화, 게임, 방송, 공연, 패션,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망라한 분야를 '문화콘텐츠'라는 말로 한데 묶고 지원하는 체계를 수립했다. 세계적으로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문화콘텐츠가 정책용어로 자리 잡자 교육과 연구도 활성화했다. 학회가 설립되고 대학의 학과가 생겨나 수많은 전문가를 키워냈다. 독립된 분야를 연결하고 융합함으로써 세상을 다른 눈으로 설명하는 새로운 개념과 범주를 만든 것이다. 오늘날 K콘텐츠의 융성은 김대중에게 빚을 졌다.

훌륭한 리더는 시대의 흐름을 '반 발짝' 앞서 관찰하고 설득하고 조직하고 행동한다. '서생의 문제의식'으로 시대의 가치를 찾고 비전을 세운다. '상인의 현실감각'으로 가치와 비전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모양으로 연결한다. 그리하여 지금, 김대중을 기억한다

임대근 한국외대 인제니움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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