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586 청산 성공을 위해선 ‘검사군단’ 차단해야
80년대 좌파 사관 여전히 횡행함을 보여줘
586청산 절실한데 친윤검사들 與 텃밭 공천되면
좌파, “검찰공화국” 비난하며 역공 빌미 삼을 것
대선 직전 온건·실용주의 이미지 가면을 썼던 잠깐의 기간을 제외하면 너무 익숙히 보아 온 장면이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기조 연설 도중 도저히 그냥 넘기기 어려운 대목이 귀에 들어왔다.
이 대표는 남북관계와 연평도, 휴전선 부근 주민들의 불안감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밤 서울 동작대교에 12대의 장갑차와 무장병력이 등장해 놀란 시민들이 신고하고 많은 분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합니다. 수백만이 죽고 전 국토가 초토화된 6·25전쟁도,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38선에서 크고 작은 군사충돌이 누적된 결과였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논리였다. 6·25전쟁이 38선에서의 숱한 국지적 충돌이 누적돼 전면전으로 확전된 것이라는 주장은 80년대 대학가 좌파 운동권을 휩쓸던 논리였다.
당시 신입생들이 3월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의식화 과정을 밟으면서 처음 접하는 코스가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주입이었다. 6·25가 남북간의 오랜 국지적 충돌과 갈등이 확전으로 이어진 내전이라는 논리는 ‘김일성이 스탈린의 사주하에 일으킨 침략 전쟁’이라는 중고교시절 교육 내용을 뒤집으며 거센 파도처럼 신입생들의 역사관을 지배했다. 민족사 최대의 비극을 초래한 김일성의 죄과는 그런 논리로 희석됐다.
하지만 상당수 학생들은 더 깊이 공부하고 더 많은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 신입생 초기 머릿속을 점령했던 수정주의 좌파 이론들이 얼마나 얄팍하고 교묘하게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더구나 그후 소련이 붕괴된 뒤 스탈린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며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어떻게 스탈린을 설득해 남침을 허락받고 준비했는지가 육하원칙하에 드러나면서 좌파 이론들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됐다.
그런데 우리 사회 한쪽에서는 이런 기막힌 역사인식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음을 이 대표의 연설에서 깨닫게 된다. 물론 이 대표가 6·25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기하려는 이념적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이 발언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대표와 민주당 일각의 세계관과 사고(思考)가 부지불식간에 그들의 등 뒤 한쪽 끝에 존재하는 이념세력의 지속적 영향력하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2021년 여름에도 “미 점령군”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그런 이념 세력이 현실 권력과 연결되는 창구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다. 지난 24일 국회에서 열린 윤미향 의원 주최 토론회에서 나온 “통일전쟁이 일어나 평화가 만들어진다면 그 전쟁관도 수용해야 한다” “북의 전쟁관은 정의(正義)의 전쟁관” “교육 의료 주거는 남쪽은 경쟁, 북은 무상. 친일청산도 남쪽은 완전히 실패, 북쪽은 성공했다. 어디가 제대로 사는 것이냐”등의 발언들은 80년대 중반 밀실에서 횡행했던 망상 수준의 인식을 그대로 지닌 이들이 온존하고 있음을, 국회가 그들의 교두보로 악용될 수도 있는 상황임을 보여준다.
선거는 행정부와 국회라는 거대한 권력의 논에 어느 저수지의 물을 댈지를 정하는 일이다. 선거 때는 중도 온건을 강조하지만 막상 선거가 끝나면 수문은 이념적 스펙트럼의 극단으로까지 활짝 열린다.
586 청산은 그런 점에서 절실하다. 단지 이념에 찌든 기득권 정치인 몇 명의 퇴출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40여 년전 군부 독재라는 환경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 시대착오적 역사관·세계관·이념의 덫을 벗어나 건전한 진보와 보수가 경쟁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기 위해 거쳐야할 과정이다.
하지만 극단적 이념 세력은 보수진영의 약점을 숙주로 삼아 극렬히 저항할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토양은 ‘김 여사 문제’와 ‘검사공화국’ 논란이다.
물론 검찰독재, 검사공화국이라는 표현은 좌파진영이 만든 허구의 프레임이다. 검찰이 전 정권 비리나 야당 의원을 수사한다고 독재라 부르면 문재인 정권 전반기 2년이야말로 검찰독재 중의 검찰독재였다.
‘검찰공화국’이라 비난하지만 현재 검사 출신 장관은 법무부가 유일하고, 장관급을 합쳐도 방통위원장 한 명이다. 그나마 민간 출신 위원장을 야당이 탄핵하려는 바람에 대체재로 임명된, 검사직 퇴임 10년이 지난 원로 법조인이다. 대통령실 비서관급 이상 중에서도 공직기강과 법률비서관뿐이다.
하지만 정치판의 선전선동은 그런 객관적 팩트의 게임이 아니다. 이 대표가 신년회견에서 586 청산론에 대해 “지금 청산해야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검사독재”라고 되받아친 것도 그런 차원이다.
동아일보 취재에 따르면 검사 출신 45명이 출마 예정이고 그중 여당은 31명이다. 숫자도 숫자지만 핵심 친윤 검사들이 텃밭 양지로 몰려드는 자체가 국민에게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원모 전 인사비서관은 강남 출마설이 돌고 있다. 그의 배우자는 지난해 대통령 부부의 스페인 방문 때 비공식 수행원으로 동행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주진우 전 법률비사관은 해운대 출마 채비를 하고 있다.
이들이 진정으로 대통령과 정권의 성공을 기원한다면 험지로 뛰어드는 게 옳은 길이지만, 그런 자세가 안 돼 있다면 해결은 한동훈 위원장의 몫이다. 만약 친윤 검사들이 대거 양지에 공천된다면 공관위가 아무리 노력해도 좌파의 ‘검찰공화국 비난 공세’는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야당도 검사 출신 출마 예정자가 14명에 달한다. 그중엔 문 정권 때 노골적 시녀 노릇으로 검찰 독립을 욕보인 인사들이 포함돼 있다. 만약 그런 이들을 텃밭에 공천해준다면 앞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공직자들이 정치적 중립은 팽개친 채 노골적으로 진영에만 충성한 뒤 금배지로 직행하는 악순환 시스템이 굳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민주당 공관위의 책임도 막중하다.
대통령과 당 대표 모두 검사 출신인 상황에서 검찰독재 운운할 빌미를 주지 않으려면 스스로 통제하고 더 강한 기준을 들이대야 한다. 검사군단 진주를 방치하면 운동권 청산이라는 시대적 소명마저 발목이 잡힐 수 있다. 검사군단 차단은 한 위원장이 ‘두 번 연속 검사 출신 대통령?’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넘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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