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이 추운 날, 돼지국밥
조리법에 무슨 차이라도 있다는 것일까. 부산역 구내 돼지국밥은 따로 밥이 나오는 것보다 토렴한 것이 천원 더 비싸다. 아무튼, 밥과 고기와 국물의 비율을 대강 맞춰가며 국밥을 먹을 때 어느새 아쉽게 바닥을 긁게 되고 펄펄 끓던 국물도 많이 식었다. 아무래도 숟가락이 건더기를 선호하는 와중에 국물은 좀 넉넉히 남겨두었다.
꽃산행을 가지 않는 주말이면 억울한 심사를 달래다가 주섬주섬 챙겨서 동묘 풍물시장에 가기도 한다. 이리저리 발품을 팔다가 결국 헌책방을 찾던 어느 날의 일화. 몸 하나 운신하기 힘든 좁은 서가의 시집 코너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출입구에서 이런 말이 들리는 거다. 대강 얼굴을 익힌 주인과 이 가게의 오랜 단골인 듯 머리 희끗한 아저씨가 나누는 대화. “거 말이야, 나는 말이오.” “….” “나중에 꼭 사돈은 강원도 사람이면 좋겠어.” “왜 그러는데….” “거 말이야, 왠지 강원도는 산이 많아서 그냥 사람들이 좋을 것 같애.” “….” “왠지 말이오, 서로 만나도 좋은 말만 할 것 같애.”
강원도에 사돈은 안 계시지만 강원하고는 무시로 출입하는 관계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봉평. 더러 그 오일장에 가면 시장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물목인 국밥을 꼭 찾는다. 아마도 봉평에서 장사 마치고 당나귀 몰고 메밀꽃 흐드러지게 핀 밤길 따라 대화로 떠나는 허생원 일행의 배를 든든히 채워주었을 국밥 한 그릇. 드르륵 좌우로 열리는 출입문의 그 장터국밥집에 가면 차림표 아래 먼저 자리 잡고 우리를 뜨내기손님으로 만들어버리며 국밥 사이로 소주도 각 1병씩 세워놓고 열심히 대화하는 봉평 어르신들. 그 모습에 문득 나도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여보게, 국밥 앞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 착해지는 것 같애.
부산역 돼지국밥집에서 일부러 국물을 조금 남겨둔 것은 이유가 있다. 임박한 기차 시간을 코앞에 둔 아슬아슬한 맛에 더해 마지막은 그릇째 들이켜고 싶은 것. 국물은 적당히 뜨겁고 그릇은 알맞게 무겁다. 이 추운 날에 돼지국밥을 두 손으로 받들면 눈앞의 한 세계가 묵직하게 들리는 느낌. 텅 빈 뚝배기 속의 좋은 것들이 나타나 얼룩진 뺨을 툭툭 두드려준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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