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규의 외교만사 外交萬思] 경제가 안보다
국제정치는 급변하고 있다. 안보우위(냉전)-경제우위(탈냉전) 시대는 종언을 고하였고 경제안보(미·중 전략경쟁)의 시대로 전환하였다. 경제안보의 시대란 안보우위 시대이면서도 경제가 안보가 되는 시대이다. 각국은 기존의 경제적 효율성 추구보다는 경쟁력 강화와 안보를 결합한 새로운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경제 및 기술 경쟁은 심화하고 보호주의의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그 결과 냉전 시기와 같이 국가와 산업정책의 귀환 현상이 강화되고 있다. 지정학적 동인의 중요성도 부활하였다. 각국의 핵심 전략인 ‘전략적 자율성’ 강화는 탈중국화로 이해되지만, 역으로 탈미국화의 추세 강화도 의미한다. 가치에 기반한 지정학이 대두되었으나, 세계 어느 국가도 순수 가치에 기반하여 대외정책을 추진하지는 않는다. 정책의 핵심은 미래 생존과 경제발전을 위한 경제이익과 역량 확보다.
2024년은 혼돈, 불확실성, 자기 보호주의 강화가 핵심적인 추세로 보인다. 세계 76개국에서 진행될 각종 선거 흐름은 대체로 보수주의로 기울고, 자기 보호주의가 핵심일 것으로 판단된다. 대만 총통선거 결과가 양안관계의 현상 유지 방향으로 귀착되었지만, 언제든 미·중 군사적 충돌이 가능하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은 국제전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며, 전황은 미국·서방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미국은 이들 양면 전쟁은 물론이고, 양안과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에 개입할 여력이 부족한 형편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현 대중정책의 두 축인 ‘동맹과 더불어’ ‘리쇼어링’(Reshoring·미국 내로 생산기지 전환) 정책 간 충돌이 명확하다. 후자가 우선시되면서 한국의 산업에도 큰 도전을 안겨줄 것이다. 서유럽, 일본, 인도 등 세계 주요국들은 ‘전략적 자율성’ 강화를 꾀하면서 각자도생 전략을 추진 중이다.
한국 안보 우위에 도전요인 급부상
윤석열 정부는 ‘가치 동맹’에 방점을 두고 경제와 산업부문에 대한 안보우위를 추구하였다. 2024년 정세는 윤석열 정부의 정책을 향한 도전요인들이 급부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첫째, 세계는 미국·서방의 영향력보다는 중국·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추이에 놓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2022년 11월 발간한 ‘A World Divided’ 보고서, 2023년 말 미국 Hamilton Index(ITIF), 2024년 호주 전략정책연구소의 ‘글로벌 핵심기술 현황’ 보고서에서도 잘 드러난다. 둘째, 미·중 전략경쟁 편승 정책의 경우 상대방으로부터 야기되는 비용도 그만큼 확대된다.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 악화가 초래할 비용이 예상보다 클 것이란 개연성이 증대하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와의 관계도 도전요인이다. 셋째, 디리스킹(Derisking·위험회피) 정책 시대는 안보를 단선적으로 강조하기보다는 유연하고 복합적인 외교·안보·산업 정책을 요구한다. 경제안보 시대에는 경제이익을 수호하는 것이 안보가 될 정도로 중요하다. 다만, 이를 획득하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고도의 외교적·지정학적 역량이 필요하다. 넷째, 트럼프 2.0 등장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조 바이든 정부의 정책에 초점을 맞췄던 윤석열 정부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할 우려가 커졌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 및 새로운 국가 대 국가 관계로서의 대남정책이 등장했다. 남북 양측이 국내정치적 여건상 강 대 강 정책을 구사하고 상호 적대적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우발적 충돌이 핵전쟁 및 국제전으로까지 확산될 위험도 커지고 있다.
역사의 진보라는 희망적 사고는 허구일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The End of History’라 선언하면서 가졌던 서구문명에 대한 낙관적 확신이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려운 국면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단선론·낙관론적 시대에서 이탈하여 비선형적 혼돈의 시대로 (일시적이건 구조적이건) 전환하고 있는 과도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윤석열 정부 ‘화용외교’ 땐 기회
2024년 국제정세는 이념과 가치에 따라 다른 강대국들과의 갈등을 불사하는 기존 윤석열표 외교안보 정책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강대국과의 조화와 협력을 중시하면서 실리를 챙기는 ‘화용외교(和用外交)’를 추진할 것을 권고한다. 안보의 단선론적 우위 정책에서 보다 실용적이고 유연한 원칙에 기반하여 경제이익을 중시하는 산업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미국에서 정부 주도 산업정책과 대중 기술 제재는 확대될 것이므로, 미국 내 새로운 입법규제와 행정명령 추이를 면밀히 검토하고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와의 마찰로 적어도 올해 상반기까지는 중국이 한국을 압박하기 위한 조치를 내놓을 개연성이 다대하다. 우선 그 대상은 산업 및 핵심광물 영역에서 나타날 것이다. 정부와 기업들은 이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하다.
2024년 세계 각국에서 안보 불안정성이 확대됨에 따라 기업의 비용과 경제 부담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 경제위기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업은 그 비용에 대비하고, 정부는 우선적으로 경제 보호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안보와 동맹의 남용을 경계하고, 경제가 안보인 시기에 경제의 붕괴는 곧 안보와 동맹의 붕괴를 초래하는 함수관계가 존재한다. 경제안보 시대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경제·기업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발전을 돕는 것이다. 국가와 산업정책의 회귀 시기에 정부는 자주 간여하거나 획일적인 지도형 정책 추구보다는 민간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최대한 고양하고, 기업을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한국은 통상국가로서 국가 정체성에 기반해 새로운 글로벌 경제 거버넌스 형성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미국 경제·산업 정책에 대해 협력을 강화하면서도, 중국·러시아·중동·글로벌 사우스와의 협력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보수화 흐름이 이어지며 주요국들은 글로벌 거버넌스 구축 경쟁에서 자국 유불리에 따른 현실적 행보를 할 가능성이 크다. 이로 인해 통상국가인 한국엔 비용 문제가 부각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추세를 잘 활용하는 ‘화용’ 정책은 오히려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정책연구소 소장·플라자 프로젝트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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