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Art, LA 미술관이 별처럼 수놓은 도시
폴 게티·LACMA 등 미술관만 100개
美 서부 아트투어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는 예술의 도시다. ‘영화의 성지’ 할리우드를 품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미국 전역을 통틀어 가장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다.
서부의 심장인 LA는 동부에 비해 미술관이 훨씬 늦게 지어졌지만, 미국의 다른 주에서 볼 수 없는 예술 생태계가 있다. 서부 지역 부호들의 기부금과 기증으로 설립된 미술관들에는 고흐, 세잔, 드가, 마그리트, 마네, 모네, 피카소 등 역사적인 명화는 물론 동시대를 이끌어가는 ‘지금의 예술’들이 한데 모여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아시아계 등 수많은 국적의 이민자를 받아들이며 성장한 도시여서일까. LA 예술계가 받아들이는 문화의 스펙트럼은 다른 어느 주보다 넓고도 깊다. 그런 LA에서 올해 유난히 많은 예술 행사가 열린다. 세계 최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데스티네이션 크렌쇼’가 2.1㎞ 대로를 따라 펼쳐진다. 그래미상을 받은 아티스트이자 유명 컬렉터인 드레이크는 문화예술계에 전설처럼 회자하던 ‘루나 루나’를 다운타운LA에 복원했다. 루나 루나는 1987년 독일 함부르크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예술 놀이공원으로 장 미셸 바스키아, 데이비드 호크니, 로이 리히텐슈타인, 살바도르 달리, 키스 해링 등 당대 최고 예술가 30여 명이 참여한 프로젝트다.
9월에는 미국 최대 아트페어인 ‘PST아트: 예술과 과학의 충돌’이 도시 전역에서 열린다. 818명이 넘는 아티스트가 참여하는 50개 이상의 전시가 예정돼 있다. 무엇보다 LA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도심과 근교에서 만나는 수많은 미술관이다. 자신의 이름이 예술과 함께 영원히 기억되길 바란 미국 석유 재벌 폴 게티의 미술관, ‘서부의 메트’로 불리는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 UCLA의 지성들에게 예술적 감수성을 전하는 해머미술관, 브로드미술관과 헌팅턴라이브러리,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까지 …. 소장품 규모와 전시 수준까지 그야말로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꿈결 속 같은 도시, 라라랜드(La La Land)다.
'수집광' 美 석유 황제…영원히 마르지 않을 '영감의 유전' 짓다
● 건축물 하나하나가 작품…LA도심서 만난 '동시대 예술'
로스앤젤레스(LA)엔 100개가 넘는 미술관이 있다. 모두 돌아본다면 1년간 여행해도 모자랄 수준이다. 꼭 미술품 감상에 욕심을 내지 않아도 좋다. 건축물 하나하나가 LA의 랜드마크로 불릴 만큼 독특한 개성과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한다. 누구나 거리를 걷고, 정원을 즐기며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얘기다. 1주일간 LA 아트 투어를 계획하는 이들을 위한 가이드를 준비했다. 그 기간이야 물론 길면 길수록 좋다.
폴 게티가 인류에 남긴 영원한 유산
폴 게티의 유산 '게티센터'
국·유럽 근현대 작품 진열
'더 브로드' 아침부터 오픈런
베벌리힐스 명소 '해머'
무료로 강연·교육·독서회
미국 역사상 최고의 석유 재벌 폴 게티(1892~1976)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개인 소장품을 LA에 묻었다. 태평양 연안 퍼시픽 팰리세이즈에 있는 게티 빌라, 샌타모니카산 해발 270m 언덕에 자리 잡은 게티 센터 등 두 곳의 미술관을 지었다. 게티 빌라의 언덕 아래엔 태평양의 거친 파도가, 게티 센터의 꼭대기에선 LA시와 주변 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게티 센터는 연간 180만 명이 찾는, 미국에서도 관람객이 가장 많은 미술관이다. 리처드 마이어가 산 위에 설계한 요새 같은 이곳은 산 아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트램을 타야 갈 수 있다. 5분가량 트램을 타고 오르면 완벽한 내진설계와 방재 시설로 지어진 명작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미술품 수집광이던 게티는 1954년 자신의 집에 갤러리를 열어 소장품을 전시했다. 인근에 고대 건축 양식의 새 미술관을 지었는데, 그게 게티 빌라다. 1974년 미술관으로 개관했지만 게티는 정작 이 미술관은 가보지도 못했다. 개관 후 2년 뒤 사망하면서 그는 6억6000만달러의 유산을 남겼다. 소장품이 늘어나자 게티 재단은 1997년 게티 센터를 지었다. 게티 빌라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 유물이 전시돼 있고 게티 센터엔 미국과 유럽 근현대 미술품이 진열됐다.
두 곳만 다 돌아봐도 하루가 모자라다. 게티 빌라의 하이라이트는 전망 좋은 야외 레스토랑과 유럽식 호화 정원. 게티 센터는 기획전시 외에도 웨스트 파빌리온에 고흐, 렘브란트, 모네 등 명화들이 모여 있다. 게티 센터 안엔 100만 권 이상의 장서와 200만 장이 넘는 사진을 소장한 게티연구소도 있다. 방문 시간 등을 미리 예약해야 하는데, 주차비를 제외하면 모두 무료다.
지성의 보고 해머 미술관
더 브로드 미술관의 건너편엔 1979년 개관한 LA의 또 다른 명품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이 있다. 잭슨 폴록에서 몬드리안, 클라스 올든버그 등 194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는 ‘동시대 미술의 현주소’를 한눈에 볼 수 있다.
UCLA 캠퍼스와 함께 LA베벌리힐스 지역의 명소는 해머미술관이다. 사업가 아먼드 해머(1898~1990)가 사망한 해에 개관한 개인 미술관인데 1994년부터 UCLA가 운영을 맡고 있다. 해머미술관은 1년에 300회가 넘는 수많은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강연과 교육 프로그램은 물론 독서회, 심포지엄, 영화상영, 음악회 같은 이벤트가 무료로 펼쳐진다. 해머미술관은 50% 이상의 전시를 여성 작가에게 할애하고, 해외 작가 및 지역 작가 등을 발굴해 예술계 신예를 키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10년부터 LA지역 예술가들을 위한 비엔날레 ‘Made in L.A.’를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미술관 정원과 레스토랑, 마당에 놓인 토머스 헤더윅의 ‘스펀 체어’ 등에 편히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현지인과 어울릴 수 있다.
하얀 벌집 미술관 브로드
현대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LA에선 아침부터 줄을 서야 하는 곳이 있다.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제프 쿤스 등 현대미술의 거장을 무료로 만날 수 있는 더 브로드 미술관이다. LA다운타운에서 새하얀 벌집 모양의 건물을 찾으면 된다. 총면적만 1만1140㎡(약 3370평), 그중 절반가량이 전시 공간이다. 개관한 지 10년도 안 됐지만, 매년 90만 명 넘는 관람객이 찾는 글로벌 명소가 됐다. 부동산 개발로 슈퍼리치가 된 자선사업가 엘리 & 에디 브로드 부부는 2015년 반세기 수집한 2000여 점의 컬렉션을 내놨다. LA 시민 누구나 유명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관람료도 받지 않는다는 가이드라인을 세웠다. 세계적 건축회사 딜러 스코피디오&렌프로는 ‘장막과 납골당’이라는 콘셉트를 내세웠다. 건물 외벽엔 유리섬유 강화 콘크리트로 미래적인 분위기를, 건물 내부 진입로는 지하 동굴을 탐험하듯 설계했다. 사방이 거울로 된 ‘인피니티 미러 룸’은 1년 내내 붐빈다.
키스 해링 회전목마, 달리…거울방 30여년 만에 깨어난 '루나 루나'
에이션 미션 스튜디오서 '잊혀진 예술 테마파크' 전시
장 미셸 바스키아의 드로잉으로 가득한 대관람차, 키스 해링이 만든 회전목마, 데이비드 호크니와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외벽을 가득 채색한 파빌리온….
미술을 좀 안다는 사람들의 꿈속 이야기가 아니다. 독일 함부르크 한복판에 잠시 존재했던, 전설이 된 30여 명의 아티스트가 실제 참여했던 테마파크 이야기다.
때는 바야흐로 1987년. 오스트리아 출신 예술가 안드레 헬러(75)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한곳에 모아 놀이기구로 가득한 예술 테마파크 ‘루나 루나’를 만들었다. 예술가들에게 지급된 금액은 고작 1만달러. 헬러는 “루나 루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여행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놀이공원을 디자인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꼬박 10년이 걸렸다. 독일 한 잡지사가 50만달러를 투자해 문을 연 루나 루나엔 그해 여름에만 25만 명이 다녀갔다. 언론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찔하고 눈부신 예술 쇼”라고 평가했고, 맥도날드가 인수 제안을 하는 등 몸값도 치솟았다.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현실은 혹독했다.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예술 축제를 지향하던 이 카니발은 유럽과 미국 투어를 계획했다가 소유권 변경과 계약 분쟁으로 소송에 휘말리며 해체됐다. 작품들은 44개의 컨테이너에 담겨 창고에 들어갔다. 30년 넘게 미국 텍사스주 한가운데 방치돼 잠들어 있었다.
모두가 이를 잊고 있던 지난해 12월 15일, 로스앤젤레스(LA) 한복판에서 루나 루나가 깨어났다. LA다운타운의 1601 이스트 6번가 ‘에이스 미션 스튜디오’에서다. ‘루나 루나 : 잊혀진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배경엔 미국의 유명 래퍼 드레이크와 그의 크리에이티브 그룹 ‘드림크루’가 있었다. 드레이크는 잊혀진 예술의 놀이동산 프로젝트를 알게 되자마자 1억달러(약 1350억원) 투자를 결정했다. 여러 컬렉터와 예술품 전문 변호사, 뉴욕의 아트 마케팅 에이전시 등이 투자 대열에 합류해 1년 넘게 복원했다.
소니아 들로네의 초대형 그림이 그려진 입구를 지나면 두 개의 대형 창고 공간이 펼쳐진다. 첫 번째 공간엔 TV 속 만화 캐릭터들과 패턴, 화려한 그네가 등장한다. 키스 해링의 회전목마, 살바도르 달리의 환상적인 거울의 방, 장 미셸 바스키아가 배경음악(마일스 데이비스의 ‘TU TU’)을 기획한 대관람차가 등장한다. 해링의 캐릭터 위에 올라타고, 바스키아의 해부학적 스케치들을 움직이며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미로는 거대한 거울의 방으로 꾸며져 길을 잃고 헤매는 동심으로 초대한다.
“돈은 자본이 아니다, 오히려 능력이 자본이다”라고 쓴 요제프 보이스의 선언문, 맨프레드 딕스의 대형 천막 무대인 ‘바람의 궁전’을 지나다 보면 1980년대 예술가들이 왜 이 프로젝트에 기꺼이 응했는지를 새삼 알 수 있다.
미니 도시를 달리는 미니카…쳇바퀴 도는 인생 축소판
LACMA의 하이라이트 '메트로폴리스Ⅱ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간판 미술관이자 15만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한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라크마(LACMA)’란 애칭으로 불리는 이곳의 전시와 작품들은 온종일 둘러봐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지만,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30분 이상 머물다 가는 작품이 하나 있다.
LA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아티스트 크리스 버든(1946~2015)의 ‘메트로폴리스Ⅱ’다. 6차선 고속도로, 18개 도로가 수많은 빌딩 숲을 지나고 그 위를 1100대의 미니카가 시속 약 386㎞로 질주한다. 이 차들은 멈추는 법이 없다. 경사로를 슬금슬금 올라가 롤러코스터를 타듯 내리막길을 미끄러져 내린 뒤 그저 달린다. 미술관이 쉬는 수요일을 제외하고, 하루 5~6회. 매시 정각 출발해 30분간 굉음을 내며 움직인다. 미니카의 질주에 리듬감을 부여하는 건 다소 천천히 돌아다니는 13대의 기차. 레고 블록과 통나무, 아크릴 등으로 제작된 200여 개의 건물은 전 세계 도시의 랜드마크 건물들을 옮겨놓은 듯 미로처럼 얽혀 있다. 시끄러운 소음과 복잡하게 얽힌 도시의 모습은 처음 볼 때는 낯설고 두렵기까지 하지만, 계속 들여다보면 나름의 규칙적인 속도로 서로 부딪치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에 명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은 2012년 1월 LACMA에 설치됐다. 너비 6.4m, 길이 9.1m에 달하는 도시의 축소판 같은 이 작품은 분해하는 데만 3개월, LACMA에 설치하는 데만 4개월 반이 걸렸다. 작가가 8명의 스태프와 참여해 6년간 공을 들였다. 미술관은 이 작품을 위해 테라스 공간을 마련해 2층 높이에서 내려다볼 수 있도록 개조했다. 첨단 기술과 복잡한 컴퓨터 설계가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 이 작업엔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나 렌더링이 사용되지 않았다. 끈과 펠트, 구리선과 자기장 시스템만 활용해 완성했다. 처음엔 동네 장난감 가게에서 파는 미니카로 실험했다가 10만 대 이상을 중국 제조사로부터 특별히 공수했다고.
LACMA 앞 202개의 가로등을 세운 ‘어반 라이트’ 작품으로도 유명한 버든은 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대형 작품을 왜 만들었을까. 프리츠 랑의 1927년 영화 ‘메트로폴리스’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생전 “머지않아 2000년대 중반 무인 자동차를 타고 누구나 걱정 없이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미래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교통 정체도, 음주운전 걱정도 없는 미래 도시의 모습을 이 작품에 담았다고. 하지만 쳇바퀴 돌 듯 같은 도시를 쉴 틈 없이 맴도는 색색의 자동차를 보면 마치 지금의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다.
LA=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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