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돌 칼럼] ‘사익·자본’ 위해 ‘공정·상식’ 배신한 통치자
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군인은 국방을, 경찰은 범죄 예방을, 근로자는 일을, 학생은 공부만 하면, 선진국으로 모두 잘살게 된다.”
1970년대 중고교 시절에 익히 들은, 교장 선생님 훈시! 순진한 우리는 이 근대적 ‘역할분담론’을 내면화하며 컸다. 단, 정치군인은 예외였다. 영화 ‘서울의 봄’(김성수 감독)은 그런 분위기에서 터진 일을 다룬다.
내가 대학에 간 1980년대 현실은 이 역할분담론의 허구를 폭로했다. ‘땡전 뉴스’가 국민을 기만했고 대학은 최루탄 범벅이었다. 선배들은 도서관에서 구호를 외치다 폭력 경찰에게 끌려갔다. 교직원들은 주동자 잡기에 바빴고, 캠퍼스 곳곳엔 ‘살인마 처단’ ‘독재타도’ ‘민주쟁취’ ‘자주통일’ 등 구호가 나붙었다. 학생식당 앞 대자보를 찬찬히 읽다가 순수하게 생각했다. ‘제발 어른들이 이런 대자보를 잘 읽고 그대로만 실천한다면 나라가 좋아질 텐데….’
그 내용은 대략 이랬다. ‘지금 한국은 군부독재다. 그 뒤엔 미 제국주의가 있다. 노동자는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농민은 농업 경시·저곡가 정책에 신음한다. 빈민은 생사 갈림길에서 허덕이고, 광주나 사북에서 저항하던 시민과 노동자는 비참하게 죽었다. (…) 결국, 우리는 공부만 할 게 아니라 민중 민주 민족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야 한다!’
그렇게 떨쳐 일어나 저항하던 학생들 상당수가 감옥에 갇히거나 강제징집돼 군대로 끌려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단과대 대표였던 나도 ‘개화 대상자’였다. 영화 ‘남영동1985’(정지영 감독)나 ‘1987’(장준환 감독)에 나오듯, 학생들은 양심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목숨도 잃었다.
한편, 1960년대 산업화 이후 병영적 노동 통제와 어용노조에 신음하던 노동자들 역시 떨치고 일어났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어용노조 퇴진하라!” “두발을 자유화하라!” “집단 체조 시간을 폐지하라!” “인간답게 살아보자!” “살인적 임금을 인상하라!” 구호들이 거리와 광장을 메웠다. 1970년 분신 항거한 전태일의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던 호소에 대한 응답이었다. 단순 생존을 넘어 사람다운 삶!
그렇게 해서 민주노조가 여기저기서 들어섰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까지 섰다. 산별노조 운동과 노동자 정당(민주노동당)이 진보 진영의 쌍두마차가 됐다. 수많은 희생을 낳으며 전개된 일련의 투쟁은 마침내 군부독재를 문민정부(김영삼 정부)로, 나아가 민주정부(김대중 정부)로 전진시켰다. 대통령 직선제는 물론 각종 민주적 제도들이 만들어졌고,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지위도 향상돼 대중 소비 시대가 열렸다. 이렇게 진보하면 통일된 자주민주 사회도 가능하겠다는 희망까지 생겼다.
그런데 이런 성취조차 맨 앞의 “근로자는 일만, 학생은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역할분담론은 결국 자본이 원했던 ‘사회통제론’이었다! 근로자가 노동자로, 공장에서 광장으로, 묵묵히 일만 하던 이들이 사람답게 살자며 아우성치고, 학생들 역시 도서관과 강의실을 박차고 나와 목숨 걸고 저항했기에 사회가 진일보했다. 학계는 학계대로, 종교계는 종교계대로, 문화예술계는 문화예술계대로 자기만의 울타리를 넘어서 온 사회를 걱정하고 행동했다. 사회 진보가 곧 자기 진보였다! 그리하여 영화 ‘변호인’(양우석 감독)에 나오듯 참여정부(노무현 정부)가 탄생했고, 모든 분야에서 역사 속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경제 시스템을 건강하게 쇄신해야 했다. 그야말로 ‘공정과 상식’의 눈으로!
그러나 놓친 것이 있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로 뭉친 재벌들은 돈의 권력을 이용해, 제각기 입법·사법·행정을 은밀히 장악했다. 영화 ‘내부자들’(우민호 감독)이나 ‘더 킹’(한재림 감독)은 그런 현실을 폭로한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던 노무현 대통령의 말은 독백이 아닌 냉엄한 현실이었다! 취임 초기 ‘검사와의 대화’에서 민주화에 동참은커녕 어깃장을 놓던 검사들의 모습은 자본과 권력 실세(특히, 검찰 특수부) 간 동맹의 증거였다. 이명박근혜 정부는 노무현식 민주화에 대한 안티테제였고, 촛불혁명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도 자본주의(자본과 검찰의 결합)를 넘지 못했다. 그렇게 자본이 권력을 농락하는 사이, 그 빈틈(부정부패)을 뚫고 송곳처럼 솟은 세력이 현 정부다. 공정과 상식을 앞세워 집권한 윤석열 정부는 이제, 사익과 자본을 위해 공정과 상식을 배신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양곡관리법, 간호법, 노란봉투법,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 김건희 주가조작 특검법, 이태원참사 특별법 등 국회를 통과한 9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특검을 왜 거부하나, 죄지었으니까 거부하는 것”이라 했던 자신의 말이 곧 부메랑이 되었다. 해병대 채 상병과 이태원참사 특별법도 그 앞에 막힌다. 반면, 재벌과 부자를 위한 감세나 규제 완화는 기꺼이 하고, 산재 예방을 위한 중대재해처벌법은 마뜩잖게 본다. 윤 정부의 공정과 상식은, 자본의 이윤 증식이 곧 민생경제란 논리다. 진실은 민생을 희생해 자본 증식을 돕는 것!
이는 국가의 존재 이유인 국민(민초)에 대한 배신이다. 최근 화마를 겪은 충남 서천 시장 상인들이 윤석열-한동훈에게 느낀 배신감도 같은 맥락이다. 참된 민생이란 생계 걱정 없고, 마음 편히 사랑하고 아이 기르며, ‘저녁이 있는’ 삶, 재미와 의미가 충만한 삶이다. 이런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혈세 내며) 대통령도 뽑고, 입법·사법·행정을 믿으며 열심히 산다. 그러나 통치자들은 이 기본 공정과 상식을 배신하고, 그 자리에 거짓말과 뻔뻔함을 채운다.
연초부터 세상을 놀라게 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살인미수 테러 역시 이 배신의 산물! ‘상식’의 눈에, 이는 단독범행이 아니다. 돈과 권력의 수인(囚人)이 아닌, 민주주의를 향해 열린 주체로 재탄생하라. 촛불 민중이 또 다른 ‘서울의 봄’을 열기 전에! 동시에 우리 민초들도 역사 발전을 위해 기본에 충실하되 두루두루 역할 ‘횡단’을 해보자. 예컨대, 문화 공간 ‘길담’에서 곧 시작하는 ‘자본 읽기’ 모임도 그래서 재미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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