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끊자 기업 몰려왔다...‘검은 양’ 그리스의 부활 신화

한경진 기자 2024. 2. 1.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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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Cover Story] 친시장 개혁 ‘심폐소생’… 경제 성적 세계 1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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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경제 위기를 맞아 "파르테논 신전이라도 팔아서 빚을 갚으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던 그리스 경제가 부활했다. 그리스 경제의 비상(飛上)을 예고하듯, 한 관광객이 2018년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폴짝 뛰어오르고 있다. /로이터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국의 경제 지표를 바탕으로 가장 탁월한 성과를 낸 ‘올해의 국가’로 그리스를 선정했다. 근원 물가상승률, 인플레이션 확산 수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고용 증가율, 주식 수익률 등 5개 경제 지표를 종합한 결과다. 이코노미스트는 “10년 전 국가 부채로 조롱거리가 됐던 그리스가 고통스러운 구조 조정을 통해 세계 경제 성적 1위 국가로 올라섰다”며 “그리스의 중도 우파 정부가 강력한 경제 개혁을 단행하고도 재집권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고 했다.

지난해 6월 25일 그리스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가 신민당사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처참한 그리스 경제를 심폐 소생시킨 인물은 지난 2019년 7월 집권한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56) 총리다. 그가 이끄는 우파 집권당인 신민주주의당(신민당)은 지난해 5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집권 2기로 접어들었다. 신민당은 41%를 득표하며 알렉시스 치프라스(50) 전 총리가 이끄는 급진좌파연합(20% 득표)을 배 이상 차이로 따돌렸다. 제1당과 2당 격차는 1974년 그리스 민주화 이후 가장 컸다. 좌파 정당을 향한 그리스 국민의 반감은 그토록 매서웠다.

2015년 초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지지자들이 공산당 깃발을 흔들며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를 응원하고 있다. /AP

어떻게 된 일일까. 기자는 9년 전인 2015년 7월 포퓰리즘 광풍이 덮친 그리스 아테네 현지에서 파탄 난 정치 경제 상황을 보도한 적이 있다. 당시 서울의 광화문 광장 격인 아테네 산티그마 광장은 붉은 공산당 깃발로 온통 물들어 있었다. ‘긴축 거부·복지 확대’라는 달콤한 공약을 앞세운 좌파 총리(치프라스)는 절망의 늪에서 국민을 구출할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리스에 앞서 두 차례(2010·2012년) 구제 금융(2400억유로)을 집행한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은 추가 자금을 요구하는 그리스 정부에 고강도 재정 긴축안을 제시한 상태였다.

2015년 7월 5일 그리스가 국민투표를 통해 국제 채권단의 긴축안을 거부(반대 61.31%, 찬성 38.69%)했다. 이날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선 반대 지지자들이 밤새도록 불꽃을 터트리며 환호했다. /AP 뉴시스

찬란했던 고대 문명이 무색한 가난한 정부는 긴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며 위협했다. “신자유주의·자본주의 체제 희생양인 그리스 국민을 탄압하는 EU 엘리트 채권단을 지옥으로 보내겠다”며 여론을 선동했고, 벼랑 끝 협상을 이어갔다. 세계가 4차 산업혁명으로 숨 가쁘던 2015년, ‘서방 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반(反)파쇼 인민 항쟁’ 같은 전근대적 구호가 유행하던 나라, 그랬던 그리스가 10년 만에 체질 개선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그래픽=김성규

◇문제아에서 모범생으로…그리스의 부활

아테네 도심에서 동쪽으로 33㎞ 떨어진 스파타 비즈니스 파크. 이곳에선 요즘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 마이크로소프트(MS)가 그리스 최초의 데이터센터를 짓고 있다. MS는 2025년까지 10억 유로(1조4500억원)를 투자해 8만5000㎡(약 2만5700평) 부지에 19.2MW(메가와트)급 센터 등 데이터센터 3개 동을 준공할 예정이다. MS는 지난 2020년 10월 ‘GR for Growth’(그리스 성장) 프로젝트를 가동하며, 디지털 인프라 확충 사업에 뛰어들었다. MS는 “기술과 사람에 투자하는 그리스의 잠재력을 믿는다”며 “낙관주의와 투명성, 민주주의로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국가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아테네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테살로니키에선 세계 최대 제약사인 화이자가 6억5000만유로(약 9500억원)를 투입해 디지털 혁신 연구단지를 설립했다. 테살로니키는 앨버트 불라 화이자 그룹 회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불라 회장은 2021년 10월 열린 준공식에서 “EU 회복 기금을 혁신과 수출, 경제 성장에 투입하는 현 정부의 개혁 정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지난 2021년 말 그리스 테살로니키 지역에 문을 연 제약회사 화이자의 디지털 혁신 허브 개관식에 참석한 미초타키스 총리와 앨버트 불라(오른쪽) 화이자 회장. /인타임뉴스

이코노미스트는 “MS·화이자 같은 유명 기업의 꾸준한 투자 흐름은 그리스가 더 이상 유럽에서 가장 병든 나라 중 하나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고 했다. 아마존, 베링거인겔하임, 폴크스바겐, 시스코, JP모건, 메타 등도 그리스 투자를 단행했다. 2022년 그리스의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입액은 전년 대비 48% 증가한 79억2800만 유로를 기록했다. 급진좌파연합이 집권했던 2018년(33억6400만유로)과 비교하면 2.4배 수준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리서치기관인 FT론지튜드가 지난해 글로벌 기업 임원 2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는 응답자 40%가 그리스 투자를 확대할 의향이 있다고 답변했다.

투자 열기는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스의 지난 1년간 주식 수익률(2022년 4분기~2023년 3분기 기준·물가 반영)은 43.8%에 달한다. 아테네에 본사를 둔 핀테크 기업 비바월렛은 2022년 그리스 최초의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으로 성장했다. 건설 붐도 일고 있다. 요즘 옛 아테네 국제공항 부지에선 그리스 민간 투자 사상 최대 규모인 82억달러를 투입한 ‘엘리니콘’ 개발 사업이 한창이다. 2001년 폐쇄된 이후 방치됐던 620만㎡(약 187만6000평) 규모 공항 부지는 호텔·관광·주거 시설이 있는 스마트 시티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여기에 코로나 종식 효과도 더해졌다. 그리스에는 지난해 관광객 1000만명이 찾아오면서, 210억유로(30조5000억원) 상당 경제 효과가 일어났다. 그리스 GDP의 18.5%(2022년 기준)를 차지하는 관광업이 뜨면서 국가 경제에도 빛이 들고 있는 셈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던 그리스는 10년 전 유로존을 무너뜨릴 뻔했지만, 이제는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가 됐다”고 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그리스의 경제성장률이 유로존 평균치의 배 이상인 2.4%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픽=김성규

◇”검은 양은 없다. 황소 뿔 잡고 간다”

그리스 경제가 국제 신뢰를 되찾는 여정에는 중독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끊어낸 국민의 각성이 있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주겠다”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1981년 선심성 복지 정책을 남발하며 빚더미에 오른 그리스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심각한 경제난에 빠져들었다. 급기야 2015년에는 급진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렉시트(Grexit· 그리스 유로존 탈퇴)’를 무기로 채권단을 공갈·협박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럴수록 국민의 삶은 더 궁핍해졌다. 결국 경제 구조 개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임을 깨달은 그리스인들은 2019년 친시장 정책을 표방한 우파 정권을 선택했다.

“그리스는 더 이상 유럽의 ‘검은 양’(골칫덩어리)이 아니다.” 미초타키스 총리가 지난해 11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미초타키스 총리는 “검은 양 그리스는 이제 유로존에서 가장 안정적인 경제로 거듭나고 있다”며 “그리스와 독일 관계의 (갈등) 서사를 바꾸는 것, 긴장과 편견, 의심의 시대를 뒤로하고 낙관적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구제금융 협상으로 거칠게 충돌해 온 두 나라의 관계가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그리스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가 지난해 11월 독일 베를린에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만났다. /그리스 정부

“황소의 뿔을 잡고 간다.” 미초타키스 총리가 즐겨 쓰는 표현 중 하나는 ‘황소의 뿔’이다. 위기 돌파를 위해 강력한 친기업 어젠다를 용기와 결단력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정치적 레토릭(수사·修辭)이다. 미초타키스 정부 초대 개발부 장관을 지낸 아도니스 게오르기아디스는 “우리는 (경제를 굴러가게 할) 바퀴를 재발명하기보다는, 이미 다른 나라에서 성공한 모범 사례를 따를 것”이라며 “비즈니스에 진심을 다하겠다”고도 했다.

시장 원리에 충실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정책 방향에 맞춰 미초타키스 총리는 법인세율을 28%에서 24%로, 배당 소득세는 10%에서 5%로 인하했다. 50만유로(약 7억3000만원) 이상 부동산을 구입할 경우, EU 거주 자격을 부여하는 프로그램을 신설해 해외 자본 유치에도 나섰다. 공기업 민영화, 관료주의 타파, 부패 방지를 위한 국가투명성기구 설립 등 투자 환경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정비했다. 무상 의료 혜택을 폐지하고, 연금 제도도 과감하게 수술했다. 지하 경제를 양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현금 영수증 제도를 도입했다. 미국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해 10월 세계 3대 신용평가사로서는 처음으로 그리스의 신용등급을 ‘BB+’에서 ‘BBB-’로 올리며 13년 만에 ‘투자 적격’ 등급을 부여했다.

◇경제 심판한 그리스인의 선택

잇따른 복지 혜택 축소로 민심이 돌아설 것이란 예상을 깨고 미초타키스 총리는 지난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재집권했다. 치프라스 전 총리가 이끄는 급진좌파연합은 최저 임금 즉각 인상, 주 35시간 근로제(현재 40시간), 연금 인상 공약으로 정권 탈환을 노렸지만, 아고라의 시민은 두 번 속지 않았다.

지난 2015년 6월 27일 현금을 찾기 위해 그리스 수도 아테네의 한 은행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그리스 은행은 통상 토요일에 문을 여는데, 이날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구제금융 협상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하면서 일부 은행들은 뱅크런(예금대량 인출 사태)을 우려해 점포 문을 닫았다. /AP 뉴시스

그리스인에게 2015년의 대혼란은 지금까지도 생생한 트라우마다. 하루 예금 인출금이 60유로(약 8만7000원)로 제한돼 매일 아침 현금자동지급기(ATM) 앞에서 발을 구르고, 밀가루와 설탕·의약품을 사재기하며 생존을 대비했던 경제적 재난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당시 아테네 중심가는 ‘(긴축안) 오히(OXI·반대)를 찍어라’ ‘부자를 먹어 치우자!(Eat the rich!)’ 같은 문구로 도배됐고, 성난 국민은 광장에서 “평생 빚만 갚다 죽을 수는 없다”며 울부짖었다. 공무원만 행복한 나라의 복지 시스템은 단단히 고장 나 있었다. 서민들은 ‘무상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 ‘웃돈’을 건네야 했고, 소득 대체율 90%에 달하는 연금 혜택에도 애당초 일거리가 없어 빈곤에 시달렸다.

2015년 여름 그리스 아테네 도심 곳곳은 처참한 경제 상황을 비관하는 그래피티(길거리 낙서)로 가득차 있었다. 급진좌파연합 정권이 공약과는 달리 채권단 요구를 전부 수용하면서 국민의 분노도 극에 치달았다. /로이터

그렉시트 시한폭탄을 흔들며 구제안을 거부했던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과의 약속을 깨고 가혹한 구제안을 전부 수용한 사실은 좌파 포퓰리즘이 붕괴하는 결정타였다. 이후 2019년과 2023년 치러진 그리스 총선은 경제 심판 선거가 됐다. 부유한 토목 사업가 집안에서 자라 공산주의 운동 이력으로 좌파 수장이 된 치프라스, 보수당 총리 아들로 하버드 MBA, 매킨지 컨설턴트를 거쳐 우파 리더가 된 미초타키스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영국 가디언은 “다시는 과거와 같은 일을 겪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유권자들의 선택을 이끌었다”고 했다.

◇수퍼 선거의 해, 세계가 그리스를 주목한다

그리스 정부는 EU 회복기금 312억 유로를 포함한 총 589억 유로(약 85조원)를 디지털 전환과 고용·인재 개발에 투자하는 중장기 경제성장 프로그램 ‘그리스 2.0′을 이행하고 있다. 오태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선임연구원은 “지난 10년간 국제 채권단에서 요구한 경제 개혁안을 충실히 이행한 그리스는 경제 체질 개선으로 좋은 성과를 내고 있지만, 관광과 해운업을 넘어 성장을 견인할 미래 산업 동력을 발굴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했다. 그리스 경제의 ‘회생 분투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란 해석이다.

그리스 총리가 올해 초 다보스 포럼에 참석해 세일즈맨처럼 친시장 정책에 관해 열변을 토하고 있다. /다보스포럼

하지만 지금까지의 변신만으로도 그리스는 ‘수퍼 선거의 해’를 맞이한 올해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2024년 세계 인구의 절반이 투표에 참여할 예정인 만큼, 전 세계 민주주의자들은 그리스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미초타키스 총리는 지난 18일(현지 시각)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 참석해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 편집장과 대담을 가졌다. “재집권에 성공한 중도 우파 지도자로서 포퓰리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왜 또 이겼을까요? 쉽고 뚜렷한 해결책이라며 제시하는 방안은 대개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공약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이행했고, 경제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결국 선거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경제이기 때문이죠. 2020년 총리 자격으로 처음 다보스에 왔을 때 외국인이 그리스에 투자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이제는 성장률, 일자리, 투자 등 과거보다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한결 쉬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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