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을 위한 투쟁, 투쟁을 위한 회복[미얀마 쿠데타 3년, 매솟을 가다③]
캔디(20대·가명)는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미얀마인인 그는 원래 한국의 4년제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던 유학생이었다. 겨울방학을 보내러 미얀마에 간 사이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에 발이 묶였고, 그 이듬해에는 군부 쿠데타가 터졌다.
실명으로 반군부 활동을 지원한 탓에 군부에 적발돼 계좌가 동결되고 테러리스트 혐의를 썼다. 영장을 들고 찾아온 군인들이 이웃에 그와 가족들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미얀마에 남는다면 자신도, 가족도 위험해질 것이 자명해 집을 떠나 11개월 동안 몸을 숨기다 태국 매솟으로 향했다.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 두명이 다가왔어요. 브로커라고 하길래 그를 붙잡고 배에서 내렸는데, 알고보니 태국 경찰이었습니다.”
캔디는 모에이강을 넘을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곧장 구금시설로 이송돼 며칠을 보냈다. 캔디는 “누울 공간도 없어 쓰레기통 옆에서 생활했다. 아이들이 울고 옆사람이 부당한 일을 당하는데, 남을 돕고자 했던 내가 그곳에서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차마 울지도 못하는, 존엄성을 잃어버린 가장 무력한 시간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오히려 웃는다”고 말했다.
미얀마로 송환되기 직전 그는 다른 활동가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후 다시 매솟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그는 한때 우수한 학생이었던 자신의 장점을 살려 아침부터 자정까지 난민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캔디는 “(나를 잡아갔던 태국 경찰과 비슷한) 갈색 형체를 보면 그날로 돌아가는 것 같다. 우리는 겉으로는 ‘밈’을 만들고 웃어도 내면은 어둡고 무겁다”며 “이곳에서 다들 돈은 못 벌어도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몸을 힘들게 해서 생각없이 잠들고 싶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쿠데타가 낳은 ‘뉴커머’ 난민
권력을 향한 소수의 욕심은 3년에 걸쳐 무수한 삶과 가정을 찢어놨다. 매솟에선 캔디처럼 쿠데타로 인생이 뒤바뀐 사람들이 서로 보살피며 살고 있다. 미얀마 카친주 출신 코아라(45) 부부는 지인들과 함께 아동 17명을 한 집에서 돌본다. 17명 중 그의 자녀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 뿐, 다른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살거나 고아가 된 경우다.
이들은 원래 공터였던 곳에 나무로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집의 규모나 세간 같은 것들이 한 눈에 보기에도 넉넉치 않아 보였다. 코아라는 일정한 수입이 없는데다 아이들 교육 문제가 걸린다고 했다. 그는 “군부가 마을에 미사일 공격을 가하고 마을을 불태워 파괴했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 와야만 했지만, 아이들로선 낯선 환경을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매솟에서 만난 미얀마인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마다 트라우마와 심리적 고통을 호소했다. 단기간에 처지가 급격히 바뀐 만큼 정신적 충격도 커보였다. 여러차례 자살시도를 한 이도 있었고, 지인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도 많았다.
이들처럼 2021년 쿠데타 이후 매솟으로 넘어온 미얀마인들은 ‘뉴커머(newcomers·새로 온)’ 난민으로 불린다. 이들은 쿠데타 이전에 건너온 소수민족 난민 등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시민불복종운동(CDM)에 동참한 교사, 의사, 간호사, 공무원, 군인, 대학생 등 미얀마 사회의 지식인·중산층이 많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효능감을 상실한 데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 굶주림보다 더 커보였다.
난민은 ‘힐링’하면 안되나요
2022년 12월 말 매솟에는 ‘뉴커머’ 난민을 위한 색다른 공간이 등장했다. 지난 16일·18일 찾은 ‘조이하우스’는 문화센터와 비슷해 보였다. 누군가는 바닥에 앉아 기타를 쳤고, 누군가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선반에는 수강생들이 직접 만든 에코백과 티셔츠가 진열돼 있었다. 미얀마 전통 춤 강습도 한창이었는데, 며칠 전에는 한국어와 K팝 댄스 강좌도 열렸다고 했다. ‘난민 지원’이라고 하면 통상 떠올리는 음식이나 옷 나눠주기 같은 활동과는 달랐다. 강사와 수강생의 신상이 노출되는 것을 우려해 한쪽에 ‘촬영 금지’ 경고가 붙은 것만 제외하면 여느 공동 회관과도 같았다.
조이하우스 운영을 맡은 네이 치 윈(43)은 설립 목표가 ‘힐링(치유)’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조이하우스를 ‘힐링 공간’이라고 부른다. 뉴커머들은 경찰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들을 위해 테라피, 예술 등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미얀마 춤, 수채화, 사진, 노래 등의 강좌로 시작해 올해는 스트레스 관리처럼 마음을 돌보는 강좌도 열 계획이다.
그는 “이런 활동이 (난민에겐) 사치라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 출신 난민 가족은 그에게 찾아와 “(난민에게도) 존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주에는 노래 강좌에 참여했던 한 여성이 “두려워서 2년 가까이 집에만 숨어 있었는데 이곳에 와 노래할 수 있어 기뻤다.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자유를 느낀 순간이었다”는 후기를 남겼다고 했다.
네이 치 윈은 “군부 치하에서는 빈자건 부자건 간에 마음속 깊이 상처가 있다. 직업과 미래를 잃은 스트레스”라면서 “정신 건강은 난민 지원에 매우 중요한 활동”이라고 짚었다. 현재 조이하우스의 강좌별 평균 지원자수는 약 300명이고, 연간 수강생은 1000명 정도다.
지난해 아들과 함께 매솟으로 온 탄(32·가명)은 “사람들이 내 눈앞에서 죽는 장면을 보고 난 후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이곳에서 마음을 치료하고 새 친구를 사귈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최고의 ‘회복약’ 군부 통치 종식은 언제쯤
그러나 이들의 몸과 마음을 궁극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쿠데타 종식과 민주주의 쟁취 뿐이다. 매솟의 미얀마인들은 반군부 진영이 활발히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만큼 무력으로 군부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사관학교 출신으로 군부 내에서 반군부 진영에 정보를 흘리는 ‘수박’(스파이) 활동을 하다 매솟으로 건너온 세인(40대·가명)은 반군부 진영에 승산이 있다고 봤다. 미얀마군의 기강이 오래전부터 무너진데다, 국민이 등돌린 군대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군인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군인 출신인 그는 “군 내부에서도 쿠데타를 지지한 것은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과 그 측근들 뿐이다. 미얀마군은 이전부터 엉망이었다. 경제적 이해관계나 계급 욕심과 같은 야망 때문에 자기들끼리도 많이들 죽인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초년 시절부터 민 아웅 흘라잉의 별명은 ‘고양이 똥’이었다. 미얀마 속어로 겉은 무르고 순진무구해 보여도 속은 꼬여있고 잔인한 사람이란 뜻”이라며 “그는 사실 겁쟁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세인은 군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은 낮게 봤다. ‘현 군 지도부를 축출하고 다른 지도부가 들어선다면 그들을 상대로 협상을 해볼 수도 있다’는 일각의 시나리오를 기자가 언급하자, 그는 “군부는 모두 민 아웅 흘라잉의 복제품과 같아 성격이나 행동방식이 비슷하다. 새로운 놈이 쿠데타를 일으킨다면 그는 흘라잉과 같거나 그보다 더 나쁜 놈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흘라잉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군부를 뿌리 뽑아 완전히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매솟에서 만난 이들에게 ‘객관적인 전망’을 기대할 순 없다. ‘군부가 약해지고 있다’는 이들의 평가에는 ‘약해지길 바란다’는 희망사항이 강하게 반영돼 있다. 이는 절박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지미(20대·가명)는 “올해에서 내년에 걸쳐 중대한 변화가 있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그때가 2020년 총선으로 당선된 국민통합정부(NUG)의 임기가 끝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래서 NUG 역시 그 전에 끝내려고 할 것이다. 만약 내년에 기회를 놓친다면 10년을 더 기다려야 될 수도 있다. 쿠데타 사태가 3년이나 길어지리라고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이라고 했다.
회복을 위한 투쟁, 투쟁을 위한 회복
미얀마의 봄을 향한 투쟁에서 현 국면은 교착상태인가, 아니면 진전인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오로지 시간만이 내려줄 수 있는 답이다. 매솟의 미얀마인들은 스스로를, 서로를 돌보며 끝을 알 수 없는 긴 싸움에 임하고 있다.
네이 치 윈은 “조이하우스가 난민들의 정신 건강을 돌보는 것 역시 ‘봄 혁명’의 일환”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력과 자금, 총이 있더라도 싸울 힘이 마음에 남아있지 않다면 지는 것 아닌가. 우리 마음에 힘이 있다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 이렇듯 회복성을 강하게 붙드는 한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버마(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AAPP)에서 정치범을 비롯한 군부 폭력 피해자와 그 가족의 정신 상담을 돕는 조 소 윈(56) 역시 “미얀마 역사에서 최악의 시기인 지금, 정신 건강 회복을 돕는 건 국가적 회복과도 연결된다. 계속 싸우기 위해선 정신 건강을 챙겨야 한다”고 밝혔다.
매솟에서의 마지막 날인 지난 23일 한 작업장을 찾았다. 한쪽에서는 반죽이 한창이었고, 가지런하게 놓인 반죽은 오븐으로 향했다. 쿠데타 이후 모 나잉(43)과 그의 동료들은 ‘봄의 함성’이란 팀을 꾸려 영양 공급이 원활치 않은 난민들에게 고칼로리 에너지바를 무료로 나눠준다. 하루에 700개 정도를 구워낸다. 4개를 한 세트로 포장해, 아침과 저녁에 각각 두개를 먹도록 했다. 이 외에도 모 나잉은 국경 지역과 미얀마 내부로 의료 용품을 보급하는 ‘백팩 헬스 팀’ 활동도 1998년부터 병행하고 있다.
그는 “최종 목표는 군부를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싸움이 지치지는 않는지 물었다. 그는 곧장 답을 들려줬다. “나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나보다 더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 내 삶을 희생해야 하더라도, 돈을 충분히 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https://www.khan.co.kr/world/asia-australia/article/202401301729001
https://www.khan.co.kr/world/asia-australia/article/202401311804001
매솟 | 김서영 순회특파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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