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기능 뺀 여당의 ‘산안지원청’…“칼은 칼집에 있을 때 무섭다”
국회에서 여야가 50인 미만 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를 두고 합의에 이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산업안전보건청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유예 전제조건으로 산업안전보건청을 요구했는데 국민의힘은 1일 조사·감독 기능을 뺀 산업안전보건지원청 설립을 역제안했다. 전문가들은 산업안전보건지원청은 고용노동부 산하 안전보건공단과 기능이 유사하고 조사권을 빼면 제대로 된 외청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비상대책위원회 회의 뒤 기자들과 만나 “단속이나 조사 업무를 덜어내고 예방·지원 역할을 하는 기구를 만드는 협상안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이른바 ‘산업안전보건지원청 설립안’이다.
민주당이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요구한 것은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를 질병관리청으로 승격해 전문성·독립성을 강화한 것처럼 산업안전보건 분야에서도 독립적 규제기관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산업안전보건청은 과거 노사정 합의로 추진되기도 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2020년 4월 “중장기적으로 산업안전보건청의 설립을 포함한 다양한 시스템(조직구조) 개편을 검토·추진한다”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 초대 노동부 장관을 지낸 민주당 김영주 의원은 그해 7월 산업안전보건청을 신설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당시 산업안전보건청 설립 입법공청회에서 “영국의 안전보건청과 한국 산재예방행정기관의 역량을 비교하면 대학생과 초등학생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 차가 크다”며 “영국에서 강한 처벌이 사회적으로 수용된 것도 전문적 산재예방 행정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영국·미국 등 산업안전보건청을 둔 나라들은 이 외청에 감독·조사 기능을 부여한다. 반면 1일 국민의힘이 제시한 산업안전보건지원청 안에서는 감독·조사 기능이 빠졌다.
안전보건 전문가들은 여당의 산업안전보건지원청 안을 두고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됐다’고 지적한다. 강태선 서울사이버대 안전관리학과 교수는 “영국·미국의 산업안전보건청은 감독·조사 기능이 있고 영국의 경우 기소권까지 있다”며 “수사권 없이는 안전보건 행정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칼은 칼집에 있을 때 무섭다는 말처럼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효율적 수사가 중요하다. 외청이 생기면 효율성이 생긴다. 탁구를 잘 치면 몸을 많이 안 움직이고도 잘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했다.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은 “단속·조사업무를 덜어내고 예방·지원을 하는 기구는 지금도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있다”라며 “안전보건 행정조직엔 고도로 훈련받은 감독관과 규제권한이 있어야 한다. 이런 토대가 있어야 지도·지원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양대노총은 한 목소리로 여당의 산업안전보건지원청 안을 비판했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산업안전보건지원청 설립은 허상”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논평에서 “산업안전보건청은 정치거래의 수단이 아니다. 제대로 된 논의를 통한 설립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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