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인데 영화인가…가재발이 추구하는 새로운 공연
“엉덩일 흔들어봐/ 왼쪽을 좀 들어봐/ 이리 가까이 와봐/ 널 상상할 수 있게/ 엉덩일 흔들어봐~”
중독적인 사운드로 2000년대 초중반 클럽가를 강타한 바나나걸의 ‘엉덩이’다. 노래를 부른 이는 안수지, 작곡가는 방시혁인데,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 테크노 음악가이자 케이(K)팝 프로듀서 가재발이다. 프로젝트 전체 프로듀싱을 맡은 그가 ‘부캐’처럼 붙인 이름이 바나나걸이고, 앨범마다 객원보컬이 바뀌는 시스템이었다.
가재발은 더는 이런 음악을 하지 않는다. 대중음악계를 떠나 사운드 아티스트가 됐다. 한때 잘나가던 케이팝 프로듀서는 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을까?
가재발의 본명은 이진원. 1990년대 중반 미국 뉴욕에서 음악 엔지니어로 음악계에 발을 들였다. 90년대 말 귀국해 믹싱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자신의 전자음악 작업도 시작했다. 그때 만든 활동명이 가재발이다. 최근 서울 영등포구 한 카페에서 만난 가재발은 “별 의미 없이 멋져 보여서 붙인 이름이다. 영국 일렉트로닉 밴드 프로디지의 유명한 앨범 표지의 게 집게발 사진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지윤의 ‘성인식’ 리믹스 등 케이팝 리믹스 작업도 많이 했다. 한국에선 발매할 곳이 마땅치 않아 영국에서 2004년 발매한 테크노 곡 ‘물’(MUUL)이 한국인 최초로 영국 테크노 차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즈음 “좀 팔리는 음악을 해보자”며 만든 바나나걸 프로젝트도 꽤 히트했다.
“가요 작업을 한창 하는데, 언젠가부터 자기복제를 하고 있더라고요. 뭐 하나 잘되니까 그걸 또 베낀 거죠. 문득 뭔가 새롭고 재밌는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테크노, 바나나걸 같은 댄스음악이 아닌 전자음악은 없을까 하고 찾아보다가 순수예술에 가까운 전자음악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어서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예술전문사 과정(음악테크놀로지과)에 들어갔다. 거기서 만난 장재호 교수와 2008년 미디어 아트팀 ‘태싯그룹’을 결성하고 오디오와 비주얼을 결합한 미디어 아트 작업을 시작했다. “오디오만 들으면 어려울 수 있으니 시각 이미지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태싯그룹으로 공연도 여러 차례 했다.
내친김에 2014년 오디오비주얼·사운드아트 축제인 위사 페스티벌을 만들고 총감독을 맡았다. “발표회나 콘퍼런스 아니면 제 음악을 들려드릴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나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을 실컷 들려주자 해서 만든 게 위사 페스티벌이에요. 처음엔 우리만 있었는데, 해가 갈수록 입소문이 나면서 이제는 관객들이 많아요.” 지난달 연 축제에는 국내외 13팀이 참가했는데, 매진됐다. 표 구해달라는 민원도 들어오고, 현장에서 표를 사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어렵다’와 ‘새롭다’는 한끗 차이예요. 전에는 우리 음악이 어렵다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제는 새롭다는 사람이 많아요. 어려워도 새로움에 매력을 느끼고 즐기는 것 같아요. 관객 취향도 다양해지고 진일보한 거죠.”
그는 2~4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틸라 그라운드에서 신작 공연 ‘언리더블 사운드’를 펼친다. 가재발 이름의 단독공연은 처음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결합한 사운드와 비주얼이 상호작용하고 실시간으로 변화하면서 도시, 현대인/존재, 해/달, 기계 등 4개의 테마로 현대의 삶을 탐구하는 작품을 50분간 선보인다. 이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돼 지원받아 제작한 작품이다. 한국 공연 이후 프랑스, 영국, 스페인, 캐나다 등의 각종 페스티벌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첫 단독공연이라 부담감도 크고 표 안 팔릴까봐 걱정했는데, 공연 나흘 전 매진됐어요. 매진은 그동안 해온 음악에 대한 피드백이라 생각해요. 지금까지 해온 게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도 좋고 기대감도 듭니다.”
그는 “가능하다면 영화제에도 출품해보고 싶다”고 했다. 오디오비주얼은 실험·예술 영화의 성격도 띠기 때문이다. “더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선보이면서 영역을 넓히는 것, 작가들이 작업에만 전념하면서도 생계를 영위할 수 있도록 오디오비주얼·사운드아트 분야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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