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간다” 파리에서 브뤼셀까지…유럽 점령한 ‘성난 농심’ [디브리핑]
독일, 벨기에, 폴란드 등 유럽 곳곳 시위 확산
비용 압박 속 정부 지원 축소·녹색 규제 강화 등 불만
우크라산 저렴한 농산물에 경쟁력 악화…남미산 유입 불안 가중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우리 농민들은 정말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유럽 전역이 성난 농심(農心)으로 들끓고 있다. 유럽연합(EU) 최대 농업 생산국인 프랑스에서는 농민 시위가 2주째 이어지며 주요 도로들이 트랙터에 봉쇄당했다. 점거 시위는 독일과 벨기에 등으로 옮겨붙어 유럽 곳곳에서 확산하고 있다.
농민들은 EU 주도의 과도한 환경 규제와 저렴한 수입 농산물 확대, 생산비용 상승 및 정부발 가격 압박 등 ‘먹고 살기 어려워지는’ 현실에 불만을 토로하며 정책 시정이 이뤄질 때까지 장기 시위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31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지난 18일 프랑스 트랙터 시위를 시작으로 유럽 곳곳에서는 EU의 각종 규제와 정책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의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남서부 지방에서 촉발된 트랙터 시위가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 수도 파리 목전까지 닿은 상황이다.
이날 프랑스 현지 매체들은 트랙터 시위대 일부가 전국 최대 규모의 농산물 도매시장인 파리 남부 외곽 렁지스 시장 입구에 다다랐다고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입구 봉쇄와 창고 침입을 시도하던 시위대 수십명이 체포됐고, 주변 고속도로에서 트랙터 시위대와 경찰차, 장갑차 등이 대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앞서 지난 29일 전국농민연맹(FNSEA)은 파리로 향하는 모든 간선도로를 무기한 차단하겠다고 밝힌 상태로, 이를 ‘파리 포위 작전’으로 명명한 프랑스 정부는 장갑차를 추가 투입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전날 벨기에서는 유럽의 주요 무역 통로인 제브뤼헤 항구가 시위대에 봉쇄되기도 했다. 봉쇄를 주도한 벨기에 일반농업인연합(ABS)은 이 자리에서 EU의 환경 규제 정책과 농산물 수입 계획에 대해 항의하고, 생산비용 상승에 대한 대책을 촉구했다.
수도 브뤼셀에서도 한 농민단체가 1일 열리는 EU 특별정상회의를 앞두고 트랙터로 광장을 점거, 정책 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마크 볼프랑케 ABS 간부는 “몇 년 전부터 계속 정부에 경고했다”면서 “농민들은 정말 절박하다”고 토로했다.
프랑스와 벨기에 뿐만 아니라 독일, 폴란드, 루마니아, 네덜란드 등에서도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스페인에서도 2월부터 농민 시위가 예고돼 있다.
농민 불만의 핵심은 각종 규제와 농업 정책으로 인한 수익 악화다. 인플레이션과 지원 축소로 ‘일한 만큼’ 충분한 보상도 받지 못하는 데다, 과도한 녹색 규제 및 저렴한 수입품과의 불공정 경쟁이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물가 상승으로 농민들의 생산비 부담이 계속 늘고 있지만 유럽 각국 정부들은 화석연료 소비 감축 등을 이유로 농업 세금 지원을 축소할 예정이다. 독일 정부는 대대적인 긴축의 일환으로 농업용 경유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기로 했고, 프랑스 역시 비(非)도로용 경유 면세 혜택 폐지 방침을 밝혔다.
로이터는 “식품 인플레이션을 낮추려는 정부 차원의 정책으로, 많은 생산자들이 에너지와 비료, 운송에 드는 높은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산 등 밀려드는 저가 농산물로 유럽산 농산물의 경쟁력이 급감하고 있는 것도 농민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있다.
EU는 우크라이나의 흑해 항로가 전쟁으로 사실상 봉쇄되자 우크라이나 곡물이 폴란드 등 동유럽을 거쳐 아프리카, 중동 등으로 수출될 수 있게 지원했다. 그러나 애초 예상과 달리 유럽 시장에 직접 유입되는 우크라이나산 곡물이 급증해 유럽산 가격이 폭락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 같은 상황은 가금류와 달걀, 설탕 등 곡물 외 분야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EU가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재개하면서, 남미산 값싼 농산물도까지 유입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이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30일 취재진들에게 “시대에 뒤쳐진 협정”이라며 FTA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업을 겨냥한 EU의 환경 규제마저 강화되며 농민들을 옥죄고 있다. 가령 EU의 보조금을 지원받으려면 공동농업정책(CAP)에 따라 경작지의 4%를 휴경지로 남겨둬야하고, 여기에 EU는 특정 살충제 사용을 금지하는 기존 지침을 강화하는 방안까지 검토 중이다.
유럽 최대의 농업협동조합·생산자 단체인 코파 코게카의 크리스티안 랑베르 회장은 “탈탄소화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규제에 의한 괴롭힘”이라며 “EU의 그린 딜(Green Deal)과 관련된 결정은 파급 효과에 대한 연구 없이 내려졌다”고 지적했다.
벼랑 끝에 놓인 농민들은 ‘장기전’도 불사하겠다며 EU와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파리 인근 트랙터 점거 시위에 참가한 장 바티스트 봉가르 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끝까지 갈 것”이라며 “시위가 한 달 동안 지속돼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자 각국 정부는 기존에 발표한 지원 축소 계획 등을 수정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독일의 경우 농민 반발을 감안해 농업용 경유 보조금 즉각 삭감이라는 당초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3년에 걸친 단계적 삭감안을 제시했다.
프랑스도 지난 26일 부랴부랴 경유세 인상 계획을 철회하는 것을 포함한 각종 농가 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당시 가브리엘 아탈 총리가 발표한 대책에는 생산비를 고려해 농민들이 시장 가격을 제안토록 하는 ‘에갈림법’ 강화, EU에 농가 보조금 지원 조건 단순화 요구 등이 포함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오는 EU 특별정상회의에서 EU 지도부 및 각국 정상들과 함께 농민 위기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유럽(농업)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농민들을 위한 매우 구체적인 사항들을 EU에 요청한 상태”라고 말했다.
연일 거세지는 시위에 EU 집행위원회도 농민들을 달래기 위한 대응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마르가리티스 스히나스 EU 부집행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우크라이나·몰도바산 수입품 급증에 대비한 조치를 발표했다. 품목 상관없이 특정 회원국의 요청이 있으면 시장 가격 왜곡 여부를 조사해 시정 조처를 제안하고, 닭고기, 설탕 등 한시적 면세 조처를 받는 품목의 수입량이 지난 2년 치 평균을 초과하면 자동으로 관세를 부과한다는 계획이다.
EU 집행위는 농민들의 또 다른 불만인 ‘휴경지 4%’ 의무도 올 한해 한시적으로 면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들 조치는 EU 전체 27개국의 최종 합의가 있어야 확정된다.
balm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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